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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한 정승댁 며느리, 장터에서 화장품 팔아 조선 제일의 여장부 되다 (출처 - 청구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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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 멘트
매일 밤 남편의 손찌검과 시어머니의 호통에 시달리던 명문가 정승댁 며느리.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혼수품이 든 보석함을 탈탈 털어 한밤중 훌쩍 담장을 넘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시집살이 대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화장품 장사! 어릴 적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쌀가루와 꽃잎을 빚어낸 마법의 연지와 백분이 조선의 여인들을 홀려버렸습니다. 눈물 콧물 쏙 빼던 가련한 여인에서 조선 뷰티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최고의 여장부로 거듭난 통쾌하고 신나는 반란!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 1: 지옥보다 끔찍한 시집살이와 매정한 남편
조선 팔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한양 최고 명문가, 하늘을 나는 새도 호통 한 번에 땅으로 뚝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닌 우의정 대감의 으리으리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 겉으로 보기에는 매일같이 산해진미가 넘쳐나고 곳간에는 금은보화가 산맥을 이루며, 근심 걱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 같은 이 거대하고 화려한 대저택의 가장 깊숙한 안채에는, 매일 밤 소리 죽여 피눈물을 훔치는 가련한 여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삼 년 전, 이 거창한 집안의 맏아들과 백년가약을 맺고 꽃가마를 타고 들어온 꽃다운 나이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녀 역시 뼈대 있는 사대부 양반가의 귀한 여식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곱게 자라왔건만, 시집을 온 첫날부터 시작된 시어머니의 지독하고 끔찍한 시집살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새벽닭이 첫울음을 채 울기도 전인 칠흑 같은 미명에 일어나, 찬물에 손을 담그고 드넓은 안채의 마루를 쓸고 닦는 것은 그저 숨쉬기 운동에 불과했습니다. 시어머니의 까다롭고 괴팍한 입맛을 맞추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밥상을 엎고 다시 차려야만 했으며, 방바닥에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져 있는 날에는 온 집안이 떠나가라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에구구,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나라를 팔아먹을 몹쓸 죄를 지었길래, 저런 굼뜨고 눈치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미련한 것을 맏며느리랍시고 집안에 들였단 말인고! 네 친정에서는 대체 여식에게 무엇을 가르쳐 보냈기에, 아침 국 하나 시원하게 끓여내지 못하고 바느질 하나 곱게 하지를 못한단 말이냐! 아침부터 네년의 그 청승맞게 죽어가는 상판대기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오늘 하루 온 집안에 재수가 옴 붙게 생겼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내 눈앞에서 물러가 마당의 장독대나 백 번 닦지 못할까!"
시어머니의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시퍼런 비수처럼 가슴 한가운데에 푹푹 꽂힐 때마다, 며느리는 그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치맛자락을 적시며 서러운 눈물만 뚝뚝 흘려야 했습니다. 억울하다고 말대꾸라도 한마디 하는 날에는 버선발로 차가운 마당에 쫓겨나 한겨울에도 반나절을 꼬박 벌서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이런 지독한 구박은 매정한 남편의 끔찍한 행패에 비하면 차라리 양반이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학문을 닦기는커녕 과거 시험에는 십 년째 번번이 낙방하고, 매일같이 기방을 제집 안방 드나들듯 하며 술과 계집, 노름에 찌들어 사는 남편. 그는 밖에서 조금이라도 화가 나거나 일이 틀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만취한 상태로 안방에 들이닥쳐, 애먼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무자비한 손찌검을 해대곤 했습니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역겨운 술 냄새를 팍팍 풍기며 안방 문을 발로 거칠게 차 열어젖힌 남편은, 조심스레 해장국을 끓여 내오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구둣발로 걷어차며 악을 썼습니다.
"야 이 멍청하고 재수 없는 여편네야! 네년이 집안에 음기를 뿜어대며 재수를 깎아먹어서, 내가 이번 과거 시험에서도 미역국을 마시고 망신을 당한 것이 아니냐! 예로부터 집안에 여자가 복을 몰고 들어와야 지아비가 출세를 하고 집안이 평안한 법이거늘, 어디서 저런 상여우 같은 흉물이 굴러들어와서 내 앞길을 이리도 콱콱 막아선단 말이냐! 보기 싫다!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져라!"
우당탕탕! 남편이 신경질적으로 걷어찬 무거운 놋쇠 주안상이 허공을 날아 뒤집히며, 그 위에 있던 귀한 백자 사발들이 산산조각이 났고 펄펄 끓던 뜨거운 국물이 며느리의 하얀 명주 저고리를 붉게 물들였습니다. 흩어지는 도자기 파편에 긁혀 하얀 손등에서 붉은 피가 뚝뚝 배어 나왔지만, 남편은 아내의 상처 따위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옷도 벗지 않고 방바닥에 쓰러져 짐승처럼 곯아떨어져 버렸습니다. 차가운 방바닥에 흩어진 밥알과 뾰족하게 깨진 그릇 조각들을 맨손으로 주워 담으며, 며느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끔찍한 절망감과 뼈에 사무치는 서러움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서리를 쳤습니다. 여자의 삼종지도라 하여 어릴 적엔 아비를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는 것이 여인의 유일한 미덕이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배웠건만. 이런 생지옥 같은 곳에서 평생을 매 맞고 구박받으며 피눈물 속에 늙어 죽어가는 것이 과연 하늘이 내린 여인의 운명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살아야 할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내가 친정에서 얼마나 귀하고 사랑받으며 자란 금지옥엽 같은 딸인데, 어찌하여 이 썩어빠진 집구석에 들어와 말 못 하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매일 밤 피를 흘려야 한단 말입니까. 밖에서는 점잔을 빼고 청렴한 척하면서, 안에서는 식구를 짓밟고 핍박하는 저 위선적이고 역겨운 양반의 허울 따위, 이제는 지긋지긋하여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꾹 참고 인내하는 것이 며느리의 부덕이라지만, 이대로 바보처럼 참고만 살다가는 내 명에 죽지 못하고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미쳐 쓰러질 것이 자명합니다. 그래요, 떠나야겠습니다. 이 끔찍하고 질긴 족쇄를 내 손으로 끊어버리고, 차라리 험한 길바닥에 나앉아 찬밥을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발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 온전한 숨을 쉬며 살아야겠습니다!'
평생을 억눌려 살아왔던 그녀의 마음속에서 한 번 단호한 결심이 서자, 지난 삼 년 동안 켜켜이 짓눌려있던 가슴속의 억울함과 슬픔이 무섭고도 차가운 분노로,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거대한 용기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차가운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고 방안을 매섭게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빈손으로 나갔다가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며칠 버티지 못하고 굶어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시선이 안방 가장 깊숙한 구석에 자리 잡은 화려한 자개농으로 향했습니다. 그 장롱 깊은 곳에는 그녀가 친정에서 시집올 때 가져왔던, 어머니가 밤새워 눈물로 챙겨주신 귀한 패물들과 영롱한 옥비녀, 그리고 묵직한 금가락지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보석함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시댁의 재물이 아닙니다. 오롯이 내 친정어머니께서 내게 주신 내 몫의 재물입니다. 이 지옥 같은 삼 년 치의 눈물값과 핏값으로,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내 혼수품을 당당히 챙겨가겠습니다."
며느리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자개농을 조심스레 열어 묵직한 보석함을 꺼내어 품에 깊숙이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장롱 맨 밑바닥에서 예전에 하녀가 입다 남겨둔 평범하고 수수한 무명치마와 낡은 저고리를 꺼내어, 지금 입고 있던 피 묻고 화려한 비단옷을 겹겹이 벗어 던진 채 재빠르게 갈아입었습니다. 코를 요란하게 골며 짐승처럼 널브러져 자고 있는 남편의 역겨운 얼굴을 마지막으로 서늘하게 내려다본 그녀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안방 문을 열고 깊고 어두운 밤의 정적 속으로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2: 보석함을 품에 안고 훌쩍 넘은 정승댁 담장
먹구름이 하늘을 짙게 뒤덮어 달빛 한 줌조차 완벽하게 자취를 감춘, 몹시도 캄캄하고 스산한 심야였습니다. 한낮에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정승댁의 넓은 마당에는, 이제 스르륵스르륵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와 처량한 풀벌레 소리만이 서늘하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억압받던 안채를 무사히 빠져나온 며느리는,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짚신을 손에 꽉 쥐었습니다. 행여나 발소리가 마루를 울릴세라 버선발로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마당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는 그저 부를 과시하는 듯 보였던 드넓은 아흔아홉 칸 기와집은, 도망을 치려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거대하고 끝을 알 수 없는 험난한 미로처럼 복잡하고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바깥 행랑채 쪽에서는 집을 지키는 노비들의 거친 코골이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간간이 들려왔고, 멀리 외양간 근처에서 컹컹 짖어대는 사나운 경비견의 짖는 소리에 그녀는 간이 콩알만 해져 몇 번이나 차가운 기둥 뒤에 납작 엎드려 숨을 헐떡여야만 했습니다.
'하늘이시여, 제발 이 불쌍한 여인을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 지옥 같은 높디높은 담장을 무사히 넘어, 저 바깥의 온전한 세상으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부디 오늘 밤만은 이 집안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가려 캄캄하게 덮어주시옵소서.'
품에 소중히 꼭 안은 묵직한 보석함의 차가운 도자기 감촉만이, 극도의 공포 속에서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동아줄처럼 느껴졌습니다. 순찰을 도는 노비의 횃불 불빛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자갈이 깔린 마당을 발소리 없이 통과하며 등줄기에 식은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무렵, 그녀는 마침내 정승댁 저택의 가장 외진 뒷마당 구석, 낡고 비교적 담장이 낮은 쪽문 곁에 다다랐습니다. 평소에는 하인들이 무거운 장작을 들이거나 몰래 궂은 짐을 밖으로 나를 때 쓰던, 인적이 몹시 드문 후미진 곳이었습니다. 쪽문 자체는 커다란 무쇠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어 밀어 열 도리가 없었으나, 다행히 문 바로 옆에는 어른 키만큼 높게 쌓여있는 커다란 참나무 장작더미가 있었습니다. 저 장작더미를 계단 삼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서기만 한다면, 여자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기와 담장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펄럭이는 무명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덜덜 떨리는 어금니를 꽉 악물며 장작더미 위로 첫발을 디뎠습니다.
명문가 사대부 양반의 규수로 태어나 평생을 깊은 규방에만 갇혀 살아, 높은 담장 밖 세상의 흙바닥을 단 한 번도 내다본 적 없던 가냘픈 그녀에게, 어두운 밤 뾰족한 기와가 얹힌 장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르는 일은 너무나도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삐죽 튀어나온 거친 나무토막에 긁혀 하얀 버선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연약한 종아리에 붉은 피가 맺혀 흘러나왔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뒤에서 횃불을 들고 미친 듯이 쫓아올 시어머니의 살기 어린 불호령과, 머리채를 휘어잡던 남편의 끔찍한 주먹질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자 초인적인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어 장작더미 꼭대기를 밟고, 기어코 거친 기와지붕 위로 몸을 솟구쳐 올린 뒤 눈을 꽉 감고 담장 너머로 몸을 던졌습니다.
"으윽...!"
짧고 억눌린 신음과 함께 담장 너머의 차갑고 딱딱한 흙바닥으로 거칠게 굴러떨어졌을 때, 며느리는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숨통이 뻥 트이는 듯한 엄청나고 짜릿한 해방감을 동시에 맛보았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채 멍든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킨 그녀의 두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진 것은, 평생 새장처럼 갇혀 지내던 화려한 감옥이 아닌 끝없이 펼쳐진 거칠고도 자유로운 진짜 세상이었습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땀에 젖은 뺨을 상쾌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꾹꾹 참아왔던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것은 지난 삼 년간 흘렸던 서러움과 절망의 눈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과, 이제부터는 온전히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벅찬 자유와 환희의 눈물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우의정 댁의 이름 없고 핍박받던 불쌍한 며느리가 아니다. 내 두 발로 당당하게 걷고 내 의지대로 숨을 쉬며, 앞으로 내 앞에 그 어떤 비바람과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오직 내 힘으로 헤쳐 나가는 당당하고 강인한 한 명의 여인일 뿐이다!"
그녀는 다리에 꽉 힘을 주고 벗겨진 짚신을 단단히 고쳐 신었습니다. 한양 도성 안에 이대로 머물렀다가는, 날이 밝자마자 사방으로 개 떼처럼 풀린 포졸들과 정승댁 하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다시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밤새도록 쉬지 않으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도성 밖으로 이어지는 인적 드물고 가파른 산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돌부리에 채어 발바닥이 부르트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자유를 향한 그녀의 굳은 의지와 결기는 꺾일 줄을 몰랐습니다. 가파른 산기슭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르며 저 멀리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발밑으로 아득하게 보이는 한양 도성의 희미한 불빛들은 마치 전생에서나 보았던 환영처럼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품속에 단단히 간직한 보석함을 한 번 더 부서져라 꽉 껴안은 그녀는, 어둠을 밀어내며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눈부신 동쪽 하늘을 향해 다시금 희망찬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3: 쌀가루와 잇꽃으로 빚어낸 기적의 연지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험한 산길과 들판을 쉬지 않고 걸어, 마침내 한양에서 며칠이나 떨어진 인적 드물고 조용한 외딴 산골 마을에 도착한 그녀. 그녀는 품속의 보석함에서 가장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금비녀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어 장터 전당포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산비탈 중턱에 자리 잡은, 비록 조그맣고 허름하지만 외부의 눈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인 초가집 한 채를 구했습니다. 방구석에는 묵은 거미줄이 쳐져 있고 문풍지 사이로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낡아빠진 집이었지만, 매일 밤 남편의 폭력과 시어머니의 호통에 두려워 벌벌 떨며 지내던 정승댁의 으리으리한 안방에 비하면 그곳은 더없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오직 그녀만의 완벽한 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도의 달콤한 시간도 잠시, 당장 텅 빈 쌀독에 쌀을 채우고 이 거친 세상을 홀로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중에 남은 패물만 축낼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평생을 비단옷 입고 규방에 앉아 바느질과 수놓기밖에 해본 적 없는 사대부 양반가 여인이, 험악한 바깥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리는 장사를 시작하기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보석함에 남은 값비싼 패물들을 하나씩 장터에 내다 팔면, 족히 십 년은 굶어 죽지 않고 배불리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방구석에 틀어앉아 과거의 재물만 까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사대부 여인의 체면이나 양반의 자존심 따위는 당장 길거리 개나 주라고 하라지. 이제부터 나는 내 두 손으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내 힘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방도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대체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며칠 밤낮을 턱을 괴고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번개라도 친 듯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는 아주 오래전의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댕기 머리를 하던 친정 시절, 그녀를 친딸처럼 끔찍이도 아끼고 보살폈던 늙은 유모가 있었습니다. 그 유모는 본래 조선 팔도를 유랑하던 손꼽히는 방물장수 출신으로, 특히 여인들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화장품을 빚어내는 데에는 그야말로 신들린 재주를 가진 장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는 유모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어깨너머로 쌀가루를 빻고 붉은 꽃잎을 찌고 꿀을 섞는 복잡한 제조 과정을 마치 재미있는 놀이처럼 지켜보고 도왔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유모와 함께 화장품을 만들며 자랐던 그녀는, 남모르게 기가 막힌 천연 화장품 제조 비법과 비율을 몸속 깊숙이 고스란히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칙칙한 여인네들의 얼굴을 순식간에 복사꽃처럼 피어나게 만들어주는 마법의 가루와 붉은 크림, 분(粉)과 연지(臙脂)! 한양의 사대부 콧대 높은 여인들과 콧대 비싼 명기들이 그토록 비싼 은자를 주고도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그 최고급 화장품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들어 장터에 내다 파는 것이다!"
무언가에 씌기라도 한 듯 두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당장 산 아래의 큰 시장으로 달려가 가장 질이 좋은 하얀 햅쌀과 붉은빛이 선명한 잇꽃(홍화) 꽃잎, 그리고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고급스럽게 담아낼 작고 예쁜 백자 도자기들을 한가득 사들였습니다. 초가집 부엌에 커다란 가마솥을 새로 걸고, 그녀의 본격적이고도 마법 같은 뷰티 화장품 제조가 막을 올렸습니다.
먼저 윤기가 흐르는 햅쌀을 맑고 차가운 산속 계곡물에 수십 번 씻어 불린 뒤, 무거운 돌절구에 넣고 밤이 새도록 쿵덕쿵덕 곱게 빻았습니다. 가녀린 팔이 빠질 듯 욱신거리고 아팠지만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고, 빻은 가루를 아주 미세한 명주실 체에 수십 번을 정성스레 걸러내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나 갓 내린 흰눈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순백의 쌀가루를 얻어냈습니다. 단지 쌀가루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녀는 산에 올라가 직접 캔 백합 뿌리의 즙과 은은하고 고상한 향을 내는 값비싼 백단향 가루를 섞어 반죽한 뒤 서늘한 그늘에 말렸습니다. 그리하여 얼굴에 톡톡 바르는 순간 뭉치지 않고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들어 피부를 옥구슬처럼 맑고 하얗게 만들어주는, 천하제일의 '명품 백분'이 완벽하게 탄생했습니다.
그다음은 창백한 입술과 뺨을 붉고 생기있게 물들일 연지였습니다. 그녀는 붉은 잇꽃을 짓이기고 찧어 촘촘한 베보자기로 진한 즙을 꾹꾹 짜내고, 그것을 가마솥 약한 불에 아주 오랫동안 달여 불필요한 수분을 날려 보냈습니다. 솥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쉼 없이 나무 주걱으로 저어주며, 최고급 꿀과 맑은 참기름을 아주 묘하고 절묘한 황금 비율로 섞어 넣었습니다. 유모에게서 배운 비법 그대로 온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며 정성을 쏟자, 묽었던 꽃즙은 어느새 영롱하고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촉촉하고 쫀득한 질감의 최고급 연지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아아, 참으로 곱고도 아름다운 빛깔이구나. 게다가 이 은은하게 퍼지는 백단향과 달콤한 꿀의 향기마저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홀리니, 세상천지 어느 여인이 이 붉은 연지와 순백의 분을 보고도 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직접 자신의 창백했던 볼과 입술에 방금 만든 연지를 살짝 찍어 바르고, 맑은 구리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였습니다. 거울 속에는 매일 밤 매 맞고 구박받으며 눈물을 흘리던 초라하고 불쌍한 며느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봄날의 복사꽃처럼 눈부시게 화사하고 기품이 철철 넘치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한 명의 훌륭한 여인이 환하고 눈부시게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정성껏 빚어낸 이 화장품이 조선 팔도의 뷰티계를 단숨에 발칵 뒤집어 놓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수십 개의 앙증맞은 도자기에 붉은 연지와 하얀 백분을 정성스레 나누어 담으며, 그녀는 묵직한 보따리를 꾸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내일 아침 열릴 거대한 장터로 나설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 4: 장터에 나타난 미모의 방물장수
아침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 전국 팔도의 온갖 진귀한 물건들과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거대하고 활기찬 장터의 한복판.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치열한 흥정 소리와 무거운 짐수레가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소리로 정신없이 부산한 그곳에, 단정하고 깔끔한 옥색 무명치마를 차려입은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당당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른 상인들의 누추한 멍석과는 대비되게, 그녀의 앞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얀 광목천이 정갈하게 깔렸고, 그 위로는 눈부시게 하얀 백자 항아리들과 앙증맞은 청자 도자기들이 마치 귀한 보석처럼 반짝이며 줄지어 놓였습니다. 여인은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평생 억눌린 채 규방에서 낮게만 속삭이던 목소리에 힘을 한껏 실어 난생처음 세상 사람들을 향해 힘차고 낭랑하게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어서들 와서 구경하시옵소서! 한 번 바르면 칙칙하고 거친 피부가 백옥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두 번 바르면 시들어가는 입술에 화사한 봄날의 복사꽃이 피어나는 기적의 연지와 분이옵니다! 한양 도성의 그 어떤 귀하고 비싼 화장품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지극한 정성과 특별한 비방이 가득 담긴 천하제일의 최고급 수제 화장품이 여기 있사옵니다! 지나가시는 걸음을 멈추고 이 고운 자태를 한 번 확인해 보시옵소서!"
처음에는 바쁘게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저 흔해 빠진 엉터리 방물장수의 허풍이려니 하며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샘플로 열어둔 작은 도자기 뚜껑 사이로, 은은하고도 고상한 백단향과 달콤한 천연 꿀 내음이 장터의 거친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퍼져나가자, 길을 걷던 콧대 높은 여인네들의 발걸음이 하나둘 마법에 홀린 듯 멈춰 서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진열된 화장품을 파는 여인 자신의 그 눈부시고 기품 있는 미모였습니다. 거친 장터의 흙먼지 속에서도 여인의 얼굴은 갓 쪄낸 찹쌀떡처럼 티 없이 맑고 뽀야며, 입술은 탐스러운 앵두를 베어 문 듯 촉촉하고 붉게 빛나고 있었으니,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완벽하고 확실한 화장품의 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 내 비록 우의정 댁 며느리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미련 없이 벗어 던졌으나, 어릴 적부터 익혀온 양반가의 기품과 내가 빚어낸 이 화장품의 진정한 가치만큼은 결코 깎아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반드시 오늘 이 장터의 모든 여인들을 이 눈부신 아름다움의 포로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
그때 마침, 건장한 가마꾼들이 메고 가는 화려한 가마 하나가 장터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기생들 중에서도 미모와 콧대가 으뜸이라는 평양 출신의 이름난 명기(名妓) '매향'이 타고 있었습니다. 매향은 조선 팔도의 좋다는 값비싼 화장품은 모조리 섭렵해 본, 몹시 까다롭고 안목이 높은 여인이었습니다. 바람결에 실려 온 예사롭지 않은 고급스러운 향기에 이끌려 멈추게 한 매향은, 호기심이 가득한 요염한 눈빛으로 가마에서 내려 여인의 좌판 앞에 섰습니다. 그녀는 옥지환을 낀 손가락으로 하얀 백분이 담긴 도자기를 집어 들며 비꼬듯 물었습니다.
"호오, 풍겨오는 향기가 아주 기가 막히게 고상하고 은은하구나. 허나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막상 얼굴에 바르면 허옇게 들뜨고 가루가 펄펄 날리는 싸구려 분이 아니더냐? 내 피부는 아주 예민하여 함부로 아무것이나 바르지 않느니라. 만약 이 가루를 바르고 내 귀한 얼굴에 붉은 흠집이라도 나면, 네년이 어찌 책임질 꼬투리라도 있느냐?"
기생의 날카롭고 쏘아붙이는 질문과 거만한 태도에도 여인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기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유롭고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누구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드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으니, 직접 고운 손등에 조금 덜어 발라보시지요. 가장 좋은 햅쌀을 맑은 물에 백 번이나 거르고 걸러 새벽이슬처럼 곱게 빚어낸 분이옵니다. 바르는 순간 피부에 착 감기어 절대 들뜨지 아니하고, 하루 종일 맑은 윤기가 옥구슬처럼 흐를 것이옵니다."
매향이 반신반의하며 고운 손가락 끝으로 백분을 살짝 찍어 자신의 손등에 둥글게 문지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거만하게 내리깔렸던 매향의 커다란 두 눈이 화들짝 놀라며 이마 위로 튀어나올 듯 커졌습니다. 여인의 말은 참으로 한 치의 거짓도 없었습니다. 보통 장터에서 파는 싸구려 분처럼 뻑뻑하게 밀리거나 흉하게 뭉치지 않고, 마치 맑고 차가운 물이 마른땅에 스며들 듯 피부에 사르르 녹아들어 손등이 순식간에 눈부신 백옥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옆에 놓인 선홍빛 연지를 살짝 입술에 얹자, 돼지기름을 바른 것처럼 천박하게 번들거리지 않으면서도, 본래 자신의 입술인 듯 자연스럽고도 생기 넘치는 붉은빛이 선명하게 머물렀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 이것은 대체 무엇으로 만든 요술이란 말이냐! 내 평생 수많은 연지분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고운 것은 처음이로다. 내가 한양 최고 객주에서 은자 열 냥을 넘게 주고 샀던 당나라산 화장품보다 백배, 아니 천배는 더 곱고 부드럽지 아니하냐! 어머나, 예들아! 당장 이 좌판에 있는 연지와 분을 모조리 싹 다 내 가마로 싣거라! 돈은 주인이 달라는 대로 후하게 쳐서 당장 내어주어라!"
조선 최고의 뷰티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명기 매향의 호들갑스러운 극찬과 흥분에, 뒤에 서 있던 다른 화려한 기생들과 장터를 지나던 여인들이 앞다투어 여인의 좌판으로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저기요! 제발 저도 그 기적의 백분 하나만 팔아 주시옵소서! 돈은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쳐서 내겠습니다!"
"아이고, 밀지 마시게나! 나도 저 복사꽃 같은 붉은 연지 하나 당장 사야 한단 말이네! 주인장, 여기 엽전 백 닢이오! 아니 은자 한 냥이오!"
순식간에 여인의 좌판 앞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녀가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 피땀 흘려 정성껏 만들어 온 화장품 수십 세트는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게 눈 감추듯 완벽하게 몽땅 팔려나갔습니다. 묵직해진 전대를 품에 안고 텅 비어버린 뽀얀 광목천을 바라보며, 여인은 벅차오르는 감격에 가슴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편의 끔찍한 폭력과 시어머니의 멸시 속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던 그녀의 처참했던 인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빚어낸 화장품 하나로 인해 이토록 눈부시고 찬란하게 다시 피어나는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양 장터 전체에는 '얼굴에 봄꽃을 피워주는 신비롭고 눈부신 미모의 방물장수'에 대한 소문이 맹렬한 산불처럼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5: 궁궐까지 뻗어나간 조선 최고의 화장품
장터에서의 엄청나고도 폭발적인 성공을 시작으로, 여인의 화장품 사업은 그야말로 날개가 돋친 듯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녀는 산속의 낡은 초가집을 과감하게 벗어나, 도성 안에서 가장 인적이 많고 목이 좋은 최고 번화가에 '화홍각(華紅閣)'이라는 화려한 간판을 걸고 으리으리한 화장품 전용 객주를 차렸습니다. 손재주가 좋고 믿을 만한 여인들을 일꾼으로 수십 명이나 고용하여 밤낮없이 질 좋은 분과 연지를 대량으로 생산해 냈지만, 물건이 진열대에 오르기가 무섭게 눈 깜짝할 새 팔려나가는 통에 늘 예약 장부가 몇 달씩 밀려있을 지경이었습니다. 화장품을 담는 용기 또한 과거의 평범한 백자에서 과감히 벗어나, 영롱한 빛을 내는 자개가 촘촘히 박힌 나전칠기 화장함과 푸른 옥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케이스를 사용하여, 조선 최고급 럭셔리 뷰티의 굳건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화홍각의 연지와 백분을 바르지 않고서는, 한양에서 내로라하며 행세하는 사대부 양반가 여인네 명함도 감히 내밀지 못한다는 유행어가 온 도성을 휩쓸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객주 안에서 장부를 꼼꼼히 확인하며 일꾼들을 독려하고 있던 그녀의 앞에, 심상치 않은 위엄과 기품을 뿜어내는 중년의 여인 하나가 조용히 들어섰습니다. 머리에 정갈하게 꽂은 값비싼 옥비녀와 금박이 수놓아진 짙은 초록색 당의, 그리고 그 뒤를 마치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따르는 험상궂은 나장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녀는 다름 아닌 궁궐 안에서 꽤나 높은 직급을 가진 상궁(尙宮) 마마님이 틀림없었습니다. 장내에서 물건을 고르며 재잘거리던 다른 귀부인 손님들이 일순간 숨을 죽이고 길을 홍해처럼 터주는 가운데, 상궁은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진열된 고급 화장품들을 이리저리 매섭게 훑어보더니 여인을 향해 무겁고도 위압적인 입을 열었습니다.
"네가 바로 요즘 도성 안 여인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재물을 긁어모은다는 그 유명한 화홍각의 주인이더냐. 내 궐 안에서 소문을 듣자 하니, 네가 빚어낸 연지와 분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하던데, 그 맹랑한 소문이 과연 진실한 사실이냐?"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그저 자연이 내린 가장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며칠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정직하게 빚어낼 뿐이옵니다. 뉘신지 모르오나, 특별히 찾으시는 귀한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여인은 상대가 궁궐에서 온 지체 높은 상궁임을 단번에 눈치채고도, 조금의 주눅 듦이나 떨림 없이 지극히 당당하고 우아한 태도로 응대했습니다. 상궁은 그녀의 그 꼿꼿하고 기품 있는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든 듯, 매섭던 눈매를 조금 풀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실은, 구중궁궐 가장 깊고 높은 곳에 계신 지존하신 분... 중전 마마께서 최근 국사를 돌보시느라 옥체에 피로가 심히 쌓이시어, 용안이 예전 같지 않게 수척해지심을 몹시 근심하고 계신다. 궐 안의 상의원에서 올리는 화장품으로는 도무지 옥안에 생기가 돌지 않는다며 탄식하시어, 내 특별히 사가에서 가장 이름난 너의 화장품을 구하러 변복을 하고 은밀히 행차한 참이다. 마마의 용안을 단숨에 환하고 눈부시게 밝혀드릴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특별한 물건을 당장 내 앞에 대령할 수 있겠느냐?"
조선 궁궐의 가장 높으신 국모, 중전 마마에게 자신의 화장품을 납품할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는 여인의 험난했던 인생에 있어 단순히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을 훌쩍 넘어, 상인으로서 조선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일생일대의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곧바로 객주 가장 안쪽의 굳게 닫힌 비밀 금고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일 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가장 공을 들여 연구해 온, 오직 단 한 사람, 최고의 여인을 위해 준비했던 특별한 나전칠기 화장함 하나를 꺼내어 상궁 앞에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습니다.
"이것은 십 년 묵은 천연 진주를 곱게 갈아 가장 맑은 햅쌀가루와 섞고, 깊은 산속에서 심마니가 캐낸 백 년 묵은 귀한 산삼의 진액을 한 방울 한 방울 짜 넣어 수백 번을 치댄 '진주 인삼 백분'이옵니다. 또한 이 붉은 연지는 머나먼 서역에서 힘겹게 들여온 진귀한 장미 향유를 듬뿍 더해 빚어낸 것으로, 그 향기가 십 리를 가고 매혹적인 붉은 색이 사흘 밤낮을 가는 신물이옵니다. 중전 마마의 존귀하신 용안에 감히 어울릴 만한 세상 유일무이한 화장품이오니, 부디 거두어 마마께 바쳐 주시옵소서."
뚜껑을 열자마자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시고 황홀한 진주 빛깔과, 정신이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고 깊은 향기에 상궁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입을 떡 벌렸습니다. 상궁은 제품의 질에 완벽하게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를 쾌척하며 결제하고는 서둘러 진주 화장함을 품에 소중히 안고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한양 도성 전체에 그야말로 엄청난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화홍각에서 올린 진주 인삼 화장품을 바르신 중전 마마의 용안이 마치 이십 대 꽃다운 시절처럼 눈부시게 젊어지시어, 임금님께서 마마의 미모에 다시금 반하시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기가 막힌 궁궐의 초대형 스캔들이었습니다! 중전 마마는 화홍각의 화장품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여인에게 '조선 왕실 공식 어용(御用) 화장품 객주'라는 어마어마한 칭호와 함께 집채만 한 금은보화와 비단을 상으로 하사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도성의 단순한 장사꾼을 넘어, 콧대 높은 양반집 마님들과 고위 관료들조차 그녀에게 화장품을 먼저 구하기 위해 뇌물을 싸 들고 와 굽실거리며 줄을 서야 하는, 조선 뷰티계의 절대적인 권력자이자 억만장자 거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발밑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막대한 재물과 권력은, 과거 그녀를 그토록 핍박했던 정승댁의 모든 재산을 합친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거대하고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 6: 뷰티계의 거물이 된 여장부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매일 밤 피눈물을 흘리며 매를 맞고 쫓기듯 야반도주했던 그 가련하고 나약했던 며느리는, 이제 한양에서 가장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기와집의 주인이자, 수백 명의 상단을 거느린 천하제일의 당당하고 기품 있는 여장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만의 부와 안위만을 좇는 탐욕스러운 졸부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자신이 겪었던 뼈아픈 상처와 서러움을 단 하루도 잊지 않은 그녀는, 남편의 끔찍한 폭력이나 지독한 시집살이에서 쫓겨나 갈 곳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불쌍한 여인들을 적극적으로 거두었습니다. 그들을 화홍각의 기술자와 일꾼으로 고용하고 따뜻한 숙식과 정당한 품삯을 제공하며, 그들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온전한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덕분에 화홍각은 고통받는 여인들에게 있어 끔찍한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희망의 성지이자 따뜻한 구원의 장소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녀가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가마에 앉아 한양 거리를 누빌 때면, 백성들은 그녀를 향해 진심 어린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며 찬사와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 눈 내리는 매서운 겨울날, 따뜻하게 달궈진 온돌방에 앉아 화장품의 새로운 향료를 배합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고를 올렸습니다.
"대행수 마님! 지금 대문 밖에서 웬 냄새나는 늙은 거렁뱅이 사내 하나가 추위에 얼어 동사할 것 같다며 덜덜 떨면서 적선을 구하고 있사옵니다. 내쫓으려 매질을 하였으나 꼴이 너무도 비참하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어찌할 방도를 여쭙고자 급히 왔습니다요."
"아무리 미천한 거렁뱅이라도 날이 이리도 뼛속까지 시리게 차가운데, 사람을 우리 집 문앞에서 얼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헛간에 장작불을 따뜻하게 지펴주고, 주방에 일러 남은 뜨거운 고기 국밥을 넉넉히 내어 배불리 먹여 보내거라."
자비로운 지시를 내린 그녀가 잠시 굳은 몸을 풀고 휴식을 취할 겸 뒷마당 쪽으로 가벼운 걸음을 옮겼을 때였습니다. 헛간 툇마루에 쭈그려 앉아, 체면도 잊은 채 굶주린 들개처럼 허겁지겁 국밥을 퍼먹고 있는 더럽고 남루한 사내의 옆모습이 왠지 모르게 몹시 낯이 익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에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 사내의 더러운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그녀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귀한 향로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과거 자신을 짐승처럼 짓밟고 매일 밤 구박했던 그 악랄하고 무능했던 우의정 댁 장남, 즉 그녀의 옛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녀가 혼수품을 챙겨 야반도주를 한 직후, 며느리가 가져온 막대한 패물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안 정승댁은 집안이 발칵 뒤집히며 큰 혼란에 빠졌고, 설상가상으로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가 도망간 울분을 핑계로 투전판과 노름에 미쳐 가산을 물 쓰듯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빚쟁이들에게 집문서까지 넘기며 집안을 완전히 풍비박산 내버렸던 것입니다. 벼슬길은커녕 빚쟁이들의 몽둥이에 쫓겨 부모마저 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홀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거지가 되어 온 나라를 떠돌던 그가, 한양에서 제일가는 억만장자 부자라는 화홍각 대행수의 대문 앞까지 밥을 빌어먹으러 흘러들어와 구걸을 하고 있는 이 기막힌 우연이라니!
조용히 다가온 그녀의 발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든 거렁뱅이 사내는, 눈앞에 선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여장부의 얼굴을 보고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습니다. 비록 옷차림과 뿜어내는 위엄은 하늘과 땅 차이로 변했지만, 한때 자신이 툭하면 걷어차고 매일 밤 때리며 구박했던 그 나약하고 가엾던 아내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헉...! 네, 네년이 어찌 여기에...! 아니, 그 억만장자라는 화홍각의 주인이란 자가... 서, 설마... 네년이란 말이냐?! 어찌 이런 기막힌 일이!"
사내는 극도의 공포와 경악에 질려 국밥 사발을 와장창 떨어뜨리고, 바들바들 사시나무 떨듯 떨며 엉덩방아를 찧고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 지독하게 찌질하고 비참한 옛 남편의 몰골을 한심하다는 듯 서늘하게 내려다보며, 그녀는 십 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뻥 뚫리는 듯한 강렬하고도 짜릿한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녀는 예전처럼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이거나 두려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겨울의 눈처럼 차갑고도 자비 없는, 위풍당당한 억만장자 대객주의 서늘하고 압도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나의 옛 지아비여. 네놈이 과거 내게 매일 밤 휘둘렀던 그 더러운 주먹과 저주 섞인 악담 덕분에, 나는 비로소 그 지옥 같은 새장을 과감히 박차고 나와 내 힘으로 조선 제일의 여장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어떠하냐? 네놈이 제 발로 걷어찼던 복덩이가, 스스로 거대한 금맥을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꼴을 밑바닥에서 우러러보는 기분이. 여봐라! 당장 저 더러운 자를 길바닥으로 끌어내어 두 번 다시 내 뜰 앞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라! 내 깨끗한 뜰 안에 저런 쓰레기 같은 자를 두어, 내가 빚어낸 맑은 화장품의 향기를 티끌만큼도 망치고 싶지 않구나!"
그녀의 서슬 퍼런 불호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건장한 하인들이 달려들어 거렁뱅이를 질질 끌고 대문 밖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사내는 매서운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거의 악행을 뼈저리게 저주하며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자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완벽하고도 비참한 인과응보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옭아맸던 찌질한 과거의 망령을 마침내 영원히 끊어낸 그녀는, 밖에서 들리는 처절한 울음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넓은 대청마루로 당당히 돌아왔습니다. 창문을 열자 맑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의 상기된 뺨을 시원하게 어루만졌고, 방 안을 꽉 채운 은은하고 매혹적인 백단향과 영롱한 연지의 향기가 그녀를 포근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여자의 팔자가 뒤웅박 팔자라 누가 함부로 말했던가. 내 운명은 결코 지아비나 시집 식구에게 묶인 족쇄가 아니라, 내 두 손으로 직접 빚어내고 내 굳은 의지로 쟁취하는 눈부시고 찬란한 보석인 것을!"
누구의 억압받는 아내도, 누구의 핍박받는 며느리도 아닌, 오직 스스로의 이름 석 자로 당당하게 조선 뷰티계를 호령하는 최고의 거상. 맑은 구리 거울 속에서 붉은 연지를 바른 채 눈부시게 미소 짓는 그녀의 옥 같은 얼굴 위로, 그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완벽하게 행복한 그녀의 찬란한 인생 제2막이, 저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처럼 영원히 아름답고 굳건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엔딩 멘트
매일 밤 눈물짓던 며느리에서 조선 제일의 화장품 재벌로 완벽하게 거듭난 통쾌한 인생 역전기, 다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과거의 아픔에 굴복하지 않고, 쓰레기 같은 남편은 미련 없이 뻥 차버린 뒤 자신의 특기를 살려 K-뷰티의 시조새로 당당히 성공한 그녀의 멋진 걸크러쉬 행보에 꽉 막힌 속이 다 시원해지셨을 텐데요! 자신의 운명을 굳건히 스스로 개척한 주인공처럼,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향기롭고 눈부시게 반짝이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통쾌하고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잊지 마시고 꾹 눌러주세요! 다음번에도 배꼽 빠지게 재밌고 가슴 뻥 뚫리는 신나고 놀라운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