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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부의 빈방에서 하룻밤 잔 머슴, 아침에 만석꾼이 되다 『천예록』의 원혼 보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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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킹 멘트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맛비 속, 길을 잃은 가난한 머슴이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음산한 폐가에 발을 들입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안방,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잠을 뒤척이던 그의 눈앞에 소름 끼치도록 창백한 소복 차림의 여인이 나타나는데... 도망치면 죽음뿐인 상황, 과연 머슴은 이 기묘하고도 오싹한 하룻밤을 무사히 넘기고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 1: 산속 폐가의 텅 빈 안방으로 숨어든 머슴

    하늘의 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세상을 온통 집어삼킬 듯한 장대비가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하는 고막을 찢을 듯한 거센 빗소리는 온 산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만들어냈고,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짙게 깔린 먹구름 탓에 사방은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하고 음산했다. 거친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허리를 꺾으며 으스스한 마찰음을 토해냈고, 평탄했던 산길은 이미 붉은 흙탕물이 거칠게 흐르는 작은 계곡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다 해진 짚신 사이로 차갑고 질척이는 진흙이 발목까지 푹푹 빠져들며 걸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놈의 장맛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이러다가 뼈마디에 빗물이 스며들어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겠어. 쯧쯧."

    어릴 적부터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마당을 쓸며 뼈가 굵은 가난한 머슴 돌쇠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거칠게 훔쳐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에 이웃 고을의 최 참판 댁에 중요한 서신을 전하고 오는 길에,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두둑한 품삯을 받아 엽전 꾸러미를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매고 서둘러 고향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낡은 무명옷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 천근만근 무거웠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산속의 지독한 냉기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왔다. 허리춤에 찬 엽전의 묵직한 무게만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쏟아지는 폭우 앞에서는 그마저도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눈앞의 산길은 무너져 내린 토사로 완전히 끊겨 있었고, 아래쪽 계곡물은 흙빛 거품을 물며 맹수처럼 포효하고 있어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었다.

    '이대로 억지 부려 산길을 고집하다간 산짐승의 밥이 되거나, 흙더미에 깔려 허무한 물귀신이 되고 말겠구나. 평생 남의 집 소처럼 일만 하다가 이제야 내 입에 쌀밥 한번 넣어보나 했더니, 여기서 이렇게 억울하게 객사할 수는 없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더라도 일단 이 지독한 비바람을 피할 곳부터 찾아야 목숨을 부지할 터인데….'

    돌쇠는 빗물에 퉁퉁 부르터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짙은 안개와 비바람이 뒤엉킨 주변을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렸다. 첩첩산중 인적이라곤 짐승 발자국조차 찾기 힘든 곳이었으나, 하늘이 아직 그를 버리지 않은 것일까. 짙푸른 안개가 일렁이는 산비탈 너머로, 시커먼 기와지붕의 윤곽이 거짓말처럼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옳다구나! 부처님이 도우셨네! 저기 집이 있구나! 산신령이 곡할 노릇이지만 필시 사람이 살았던 인가임에 틀림없어!"

    돌쇠는 마지막 남은 안간힘을 쥐어짜 내어 비탈길을 기어오르듯 허겁지겁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무릎이 깨져 피가 흘렀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리며 다가간 곳에는, 깊은 산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으리으리하고 규모가 거대한 기와집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솟을대문 앞에 선 돌쇠의 등골로 서늘한 기운이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터럭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폐가였던 것이다. 육중한 대문은 썩어 문드러져 한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채 잡초더미 속에 처박혀 있었고, 족히 백 평은 넘어 보이는 넓은 마당에는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무성한 쑥대와 가시덤불이 흉측하게 우거져 마치 귀신들의 놀이터 같았다. 화려했을 지붕의 기왓장들은 곳곳이 이빨 빠진 듯 깨져나가 잡초가 자라나고 있었고, 창호지가 갈가리 찢겨 나간 문창살 사이로는 짐승의 곡성 같은 기괴한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세상에, 어찌 이리 깊은 산골짜기에 이토록 큰 대궐 같은 집이 버려져 있단 말인가. 필경 무서운 역병이 돌았거나, 끔찍한 흉사가 벌어져 일가족이 몰살당한 흉가임이 틀림없어. 낮에도 이리 소름이 돋는데, 밤이 되면 필시 도깨비나 원귀가 득시글거리겠지.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밖에서 얼어 죽으나, 안에서 귀신에게 홀려 죽으나 한 번 죽는 건 매한가지다. 일단 비부터 피하고 보자.'

    돌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무너진 대문을 타넘고 질척이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흙탕물 소리가 텅 빈 집안에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집안 구석구석 음산한 기운이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가장 안쪽에 위치한 널찍한 안방 쪽은 지붕이 제법 온전하여 거센 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돌쇠가 삐걱거리는 마루를 조심스레 밟고 올라서서 낡은 안방 문을 밀어 열자, 퀴퀴하게 묵은 곰팡내와 흙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듯 훅 끼쳐왔다.

    방 안은 썰렁하게 텅 비어 있었고, 구석에 거미줄이 잔뜩 쳐진 낡은 자개장 하나와 다 부서진 목탁 하나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돌쇠는 문가에 조심스레 봇짐을 내려놓고, 젖은 저고리와 바지를 훌렁 벗어 물기를 꽉 짜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마른 짚풀과 나뭇조각들을 모아놓고는, 품속 깊이 간직해 비에 젖지 않은 부싯돌을 꺼내어 힘겹게 부딪쳤다. 타닥,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주황빛 관솔불이 방안을 어스름하게 밝히자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돌쇠는 불씨에 꽁꽁 언 손과 발을 바싹 대고 녹이며, 봇짐 속에서 차갑게 굳어버린 주먹밥 한 덩이를 꺼내 허겁지겁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모래알을 씹는 듯 퍽퍽했지만, 뱃속에 무언가 들어가자 극도의 긴장과 추위로 경직되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후유… 살았다, 살았어. 오늘 밤은 여기서 어떻게든 버티고, 내일 아침 동이 터서 비가 멎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여길 떠나야겠다."

    얼어붙었던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지난 며칠간 쉬지 않고 산길을 걸었던 엄청난 피로와 긴장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참을 수 없는 지독한 졸음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돌쇠는 봇짐을 둥글게 말아 베개 삼아 베고는 차가운 방바닥에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문밖에서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한 비바람이 창틀을 사납게 흔들며 울부짖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낼 장사는 없었다. 그의 의식은 점차 먹물을 풀어놓은 듯 흐릿해지며, 곧 짐승처럼 깊고 깊은 수렁 같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 적막하고 음산한 흉가의 밤이 그에게 어떤 끔찍하고도 기이한 인연을 가져다줄지, 돌쇠는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숨을 골랐다.

    ※ 2: 눈물을 흘리며 나타난 소복 입은 과부의 원혼

    돌쇠가 깊은 잠에 빠져든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뼛속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기이하고도 지독한 한기에 스르르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기 전, 그의 청각을 먼저 자극한 것은 너무도 기형적인 '고요함'이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집어삼킬 듯 귓구멍을 때리던 요란한 폭우 소리도, 사납게 문풍지를 쥐어뜯던 비바람 소리도 거짓말처럼 싹 사라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증발해 버린 듯한,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지독한 정적만이 칠흑 같은 어둠 속 안방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으스스하네…. 내가 지펴둔 불씨가 그새 다 꺼져버렸나. 비가 그친 것 같긴 한데, 방안 공기가 어찌 이리 한겨울 섣달그믐처럼 얼음장같이 차갑고 뼛속까지 시린 게야….'

    직감적으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돌쇠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경악스럽게도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커다란 맷돌 수십 개가 그의 가슴팍과 팔다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제 맘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지독한 가위눌림이었다. 숨을 쉬려 해도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돌쇠는 억지로 침을 꿀꺽 삼키며 공포에 질린 눈동자만을 미친 듯이 굴려 캄캄한 방안을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던 어두운 방 한가운데서, 아주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방바닥에서부터 희스름하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 안개 같은 것이 서서히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며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안개가 완전히 걷힌 자리에 나타난 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소복을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허리춤까지 길게 늘어뜨린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듯 축 늘어져 방바닥을 쓸고 있었고, 창백하다 못해 소름 끼치도록 푸른빛이 도는 여인의 얼굴에는 생기라곤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핏기 없는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무엇보다 돌쇠를 기절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아넣은 것은 여인의 두 눈이었다. 깊게 팬 여인의 눈동자에서는 투명한 눈물 대신, 새빨갛고 끈적이는 핏방울이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져 내려 하얀 소복의 가슴팍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돌쇠는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뒹굴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만 가지 소름이 쫙 돋으며 온몸의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귀, 귀신이다! 마을 노인네들이 이 깊은 산속 흉가에 원귀가 산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어! 아이고, 나는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엽전 꾸러미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귀신한테 혼을 빼앗겨 죽게 생겼네!'

    여인은 소리 없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다가와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돌쇠의 발치에 스르르 멈춰 섰다. 여인이 다가올수록 방 안의 온도는 급격히 곤두박질쳤고, 돌쇠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살려달라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성대는 꽁꽁 얼어붙어 "끄윽, 끄으윽" 하는 기괴한 신음만을 간신히 토해낼 뿐이었다.

    여인은 핏발 선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닥에 누운 돌쇠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여인의 파란 입술이 달싹이더니, 유리를 긁는 듯 찢어질 듯 날카로우면서도 한없이 애처로운 목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갈랐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산 자의 몸으로 이 끔찍한 사지의 땅에 발을 들이셨소…. 이곳은 당신 같은 따뜻한 피를 가진 이가 머물 곳이 아니거늘…."

    그 소리는 돌쇠의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차가운 송곳이 머릿속을 직접 파고들어 뇌리를 긁어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텔레파시처럼 울려 퍼졌다. 돌쇠는 질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과 옥황상제, 돌아가신 부모님까지 번갈아 부르며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여인은 돌쇠의 목을 조르거나 해치려는 기색 없이, 돌연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더니 가슴을 치며 서럽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는 귀신 특유의 소름 끼치는 소리라기보다는, 너무도 애통하고 구슬퍼서 듣는 이의 간장마저 끊어놓을 듯한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짐승이 울부짖듯 한참을 토해내듯 울던 여인이 옷고름으로 피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두려워 마시오, 나그네여. 내 비록 구천을 떠도는 흉측한 원귀의 몸이나, 무고한 당신을 해치려 나타난 것이 결코 아니오. 그저… 그저 내 지아비의 죽음이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여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이다, 당신이 뿜어내는 따뜻한 사람의 기운에 이끌려 마지막 희망을 품고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오."

    그 말에 돌쇠는 아주 조금, 바위처럼 굳어있던 몸의 긴장을 풀고 파르르 떨리는 실눈을 떠 여인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인의 하얀 소복 이곳저곳에는 찢긴 자국과 함께 끔찍한 칼자국 같은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도 돌쇠의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동정심과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대체 이 여인에게 무슨 기막히고 억울한 사연이 있기에, 죽어서도 저승에 가지 못하고 저리 피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단 말인가.'

    돌쇠의 마음속에 번진 아주 작은 연민을 귀신같이 눈치챘는지, 여인은 더욱 애달픈 목소리로 자신이 품은 천추의 한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본디 이 집은 떵떵거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우리 부부의 다복한 보금자리였소. 인심 좋기로 소문난 나의 지아비는 고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선비였지. 허나, 몇 해 전 바로 오늘처럼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던 칠흑 같은 밤… 흉악무도한 떼강도 산적 놈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 집 담장을 넘었소. 눈이 뒤집힌 그 악당들은 집안의 가인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재물을 겁탈하더니, 내 앞에서 나의 지아비를 짐승 잡듯 잔인하게 난도질해 죽여버렸소. 나는 그들의 더러운 손에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품에 품고 있던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여인은 그때의 끔찍한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피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 슬픔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소. 그 짐승만도 못한 놈들은 증거를 인멸하겠다며, 찢겨 죽은 내 지아비의 가여운 시신을 질질 끌고 가 부엌의 차가운 부뚜막 아래 깊이 파묻고 흙으로 덮어버리고는 도망쳐 버렸소이다. 차가운 흙더미 속에서 짐승의 뼈처럼 썩어가는 낭군의 참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 아내의 심정을 그 누가 알겠소. 내 혼백이 갈가리 찢기고 불에 타는 듯하여 도저히 저승길에 오를 수가 없소. 제발… 천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부탁이니… 내일 날이 밝거든 부엌의 큰 부뚜막 아래 잠든 내 남편의 시신을 찾아 양지바른 곳에 거두어 주시오. 그리만 해준다면, 이 은혜는 내 백골이 진토 되어도 결단코 잊지 않고 갚으리다."

    절절한 당부의 말을 마친 여인의 형상은, 한 줄기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오자 마치 향연이 흩어지듯 스르르 허공 속으로 녹아내렸다.

    "아앗!"

    여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돌쇠의 온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압박감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돌쇠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은 그의 온몸은 이미 차가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캄캄한 방 안은 언제 귀신이 다녀갔냐는 듯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귓가를 때리던 여인의 애끓는 목소리와 섬뜩한 피눈물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 3: 억울하게 묻힌 백골과의 대면

    돌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널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골랐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턱이 떨려왔다. 방금 겪은 일이 꿈이나 헛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여인이 서 있던 자리 주변에 맴도는 서늘한 한기와 옅은 피비린내가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여인이 쏟아내던 피눈물의 끔찍한 잔상과 귀를 파고들던 애달픈 목소리가 돌쇠의 뇌리에 깊은 낙인처럼 찍혀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이건 꿈이 아니야. 진짜 원귀가 내게 나타난 게 틀림없어! 날이 밝기도 전에, 아니 당장 지금이라도 짐을 꾸려서 이 지옥 같은 흉가를 빠져나가야 해! 밖에서 비바람에 휩쓸려 죽는 한이 있어도 귀신 소굴에서 더는 1초도 머물 수 없어!'

    극도의 공포심이 이성을 마비시키며 온몸의 세포가 도망치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돌쇠는 허둥지둥 널브러진 봇짐을 챙겨 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마루로 나서려던 찰나, 그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춰 섰다.

    '…차가운 흙더미 속에서 썩어가는 낭군을 생각하면 내 혼백이 갈가리 찢기는 듯하오….'

    여인의 그 처절하고도 뼈저린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때리며 돌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듯했다. 평생을 남의 집 밑바닥에서 종노릇을 하며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온 돌쇠였다. 가진 것 없는 자의 서러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쫓겨나도 하소연할 곳 하나 없던 그 쓰디쓴 눈물의 맛을 뉘라서 모를까. 비록 귀신일망정, 억울하게 비명횡사하여 차가운 흙바닥에 버려진 채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지아비를 향한 과부의 절절한 슬픔과 천추의 한이, 이기적인 공포심을 뚫고 돌쇠의 굳은 마음을 거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에라, 이놈의 빌어먹을 팔자야! 사람으로 태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았으면, 죽기 전에 사람다운 짓거리라도 한 번 해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니냐. 어차피 이 장맛비에 길을 나서봤자 죽은 목숨! 옛말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불쌍한 귀신 소원 하나 못 들어주고 모른 척 도망가면 내 평생 두 다리 뻗고 자기는 글렀지!"

    돌쇠는 꽉 쥐고 있던 문고리를 놓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크게 심호흡을 하여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부싯돌을 쳐서 꺼져가던 관솔불을 밝혀 들었다. 이글거리는 작은 불꽃이 그의 결연한 얼굴을 비추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나서자, 밖은 어느덧 비가 잦아들고 짙은 어둠 속에서 안개비만이 스산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마치 기괴한 요괴의 손짓처럼 보였지만, 돌쇠는 흔들리는 불빛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이고 집의 측면에 위치한 부엌 쪽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탕!

    수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두꺼운 나무 부엌문이 소름 끼치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눅눅한 곰팡내와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음산한 흙냄새가 한꺼번에 확 풍겨와 헛구역질을 유발했다. 관솔불의 미약한 붉은빛을 이리저리 비추며 넓은 부엌 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천장에는 집채만 한 거미줄이 무성하게 매달려 있었고, 한때 수십 명의 밥을 지어냈을 커다란 가마솥들은 이미 흉측하게 붉게 녹슬어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말대로, 부엌 가장 깊숙한 안쪽에는 어른 세 명이 누워도 남을 만큼 커다랗고 육중한 흙 부뚜막이 침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쇠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부엌 한구석에 나뒹굴던 낡고 녹슨 괭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무 자루는 반쯤 썩어 문드러져 손에 가시가 박혔지만, 아쉬운 대로 단단한 흙을 파내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는 겉옷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부뚜막 바로 앞의 단단하게 다져진 흙바닥을 향해 괭이를 치켜들고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퍽! 퍼억!

    어둡고 고요한 폐가의 부엌에 둔탁하고 무거운 괭이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메아리쳤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흙바닥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질겼다. 몇 번 내리치지도 않았건만 돌쇠의 이마와 등줄기에는 금세 비 오듯 땀이 맺혀 뚝뚝 떨어졌고, 괭이를 쥔 손바닥은 마찰로 인해 물집이 잡히고 까져 벌겋게 쓰라려 왔다. "아이고, 허리야…." 간간이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돌쇠는 이를 악물고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괭이질을 해댔다.

    그렇게 한 식경(약 30분)쯤 흙을 파내려 갔을 무렵이었다.

    까아앙-!

    투박하게 흙을 파고들던 괭이 끝에 무언가 단단하고 속이 빈 듯한 끔찍한 파열음이 걸려 올라왔다. 돌쇠의 억센 손놀림이 순간 번개를 맞은 듯 우뚝 멈칫했다.

    '여, 설마… 벌써 나온 것인가….'

    돌쇠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천천히 괭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피가 맺힌 떨리는 맨손으로 괭이 끝이 닿았던 곳의 축축한 흙을 살살 긁어내기 시작했다. 차갑고 질척이는 진흙더미 사이로, 시커먼 흙과 대비되는 희끄무레하고 둥근 무언가가 불쑥 그 끔찍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이 뻥 뚫린 채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아아아… 부처님 대자대비하시어…."

    돌쇠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귀신 여인의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온전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끔찍한 두려움보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왈칵 차오르는 깊은 연민과 서러움이 그를 덮쳤다. 돌쇠는 다시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주변의 흙을 완전히 걷어내기 시작했다.

    흙을 파낼수록 처참하게 널브러진 온전한 형태의 백골이 그 비참한 전모를 드러냈다. 평온하게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시퍼런 칼날에 깊게 베이고 무참히 부러져 금이 간 뼈들이 짐승처럼 웅크린 채 처박혀 있었다. 그날 밤, 억울하게 목숨을 구걸하며 피 흘려 죽어간 양반의 끔찍했던 참상과 고통이 앙상한 뼈마디마다 고스란히 증명되어 남아있었다.

    돌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비록 낡고 해졌으나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른 겉옷을 벗어 차가운 흙바닥에 정성껏 넓게 펼쳐 깔았다. 그리고는 벌벌 떨리는 투박한 손으로 진흙과 오물이 잔뜩 묻은 뼈들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거두어 올렸다. 행여나 부서질세라,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친부모님 시신을 모시듯 지극히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뼈를 맞추어 옷 위에 가지런히 뉘어놓았다.

    "참으로 원통하고 애달프십니다…. 얼마나 춥고 아프고 외로우셨습니까. 천한 제 놈이 감히 어르신을 만져 죄송합니다만, 이제 제가 양지바른 곳에 고이 모셔드릴 터이니, 제발 그 무거운 원한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부인과 함께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눈물을 훔치며 마지막 작은 손가락뼈 한 조각까지 모두 수습하여 겉옷으로 소중히 감싸 안아 묶은 그 순간이었다. 밤새도록 바깥에서 세상을 부술 듯이 무섭게 몰아치던 비바람 소리가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멎어버렸다. 먹물처럼 짙게 깔려있던 잿빛 구름이 서서히 걷혀나가며, 열린 부엌 문틈 사이로 맑고 투명한 새벽의 아침 햇살이 한 줄기 길게 스며들어와 돌쇠의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돌쇠는 밤새 겪은 이 믿기지 않는 기이하고도 슬픈 일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흙투성이가 된 유골 꾸러미를 품에 단단히 안은 채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웠던 긴 밤이 끝나고,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4: 쏟아져 나오는 은괴와 토지 문서

    천지를 뒤집어엎을 듯 며칠 밤낮을 퍼붓던 장맛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멎고,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찬란하고도 붉은 아침 햇살이 폐가의 마당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밤새 요동치던 먹구름이 물러간 맑게 갠 푸른 하늘 아래, 산새들의 지저귐이 조심스럽게 정적을 깨뜨렸다. 유골을 정성스레 수습하여 제 낡은 겉옷으로 단단히 묶어 품에 안은 돌쇠가, 막 참담했던 부엌을 나서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스산하지만 어젯밤처럼 얼음장같이 차갑지만은 않은, 어딘가 애틋하고 다스운 온기가 맴도는 한 줄기 훈풍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그 묘한 바람결에 실려, 돌쇠의 귓바퀴를 다정하게 간지럽히는 가녀리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피눈물을 흘리며 원한을 토해내던 그 소름 끼치던 음성이 아니라, 한결 편안해지고 맑아진 여인의 목소리였다.

    "은인… 참으로 고맙소. 산 사람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이 끔찍한 흉가에서, 억울하게 죽은 원귀의 한 맺힌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이리 지아비의 시신을 따뜻하게 거두어 주시니… 이 크나큰 은혜는 우리 부부의 백골이 진토 되어도 결단코 잊지 않고 갚겠소. 가시기 전에 안방으로 가보시오. 안방 깊숙한 곳에 딸린 작은 군불 아궁이 아래, 우리 부부가 평생을 아끼고 모아두었던 가문의 재물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소이다. 피에 굶주린 흉악한 도적 떼 놈들도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남겨둔 것이니, 부디 그것을 온전히 거두어 은인의 남은 삶을 위해 유용하게 써주시오. 그것이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돌던 우리 부부의 마지막 간절한 바람이자, 당신의 따뜻한 심성에 대한 작은 보답이오…."

    목소리는 아침 이슬이 따스한 햇살에 스르르 녹아내리듯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지며 완벽한 고요 속으로 사라졌다. 돌쇠는 그 자리에 마치 돌부처처럼 우뚝 멈춰 선 채, 훈풍이 스치고 지나간 빈 허공을 향해 말없이 아주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밤새 그의 목을 조르던 극심한 두려움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탐욕스러운 도적들의 칼날 아래 처참하게 쓰러져간 한 맺힌 원혼들의 구슬픈 사연에 대한 깊은 애잔함과 묵직한 연민만이 가슴 깊은 곳에 먹먹하게 남았을 뿐이었다.

    돌쇠는 유골을 싼 옷가지를 마루 한편 비를 맞지 않는 가장 깨끗한 곳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바닥에 뒹굴던 괭이를 다시 고쳐 쥐고 어젯밤 자신이 잠을 청했던 안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여전히 퀴퀴하게 묵은 냄새가 났지만, 어젯밤 그의 숨통을 틀어막고 온몸을 짓누르던 그 끔찍하고 음산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침의 맑은 공기만이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여인이 일러준 대로 방의 가장 안쪽 구석을 살피니, 낡은 장작더미에 가려져 있던 작고 초라한 군불 아궁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불을 지피지 않아 입구에는 새하얀 거미줄이 겹겹이 쳐져 있었고, 안쪽에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궁이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돌쇠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저 없이 괭이를 치켜들어 아궁이 바닥의 단단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부엌의 거대한 부뚜막보다 훨씬 깊숙하고 단단하게 다져진 점토 바닥이었다. 돌쇠의 억센 팔뚝에 핏대가 섰고, 밤새도록 이어진 긴장과 노동으로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눈앞을 가렸지만, 그는 묵묵히 이를 악물고 괭이질을 이어갔다. 한 뼘, 두 뼘… 흙을 파 들어가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흙의 색깔이 짙어지고 습기가 배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파 내려갔을까. 거칠게 내려찍던 괭이 끝에 둔탁하고도 묵직한 금속음이 '텅' 하고 울려 퍼졌다.

    돌쇠는 순간 숨을 헉 하고 멈추고 괭이를 옆으로 치웠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물건임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피 맺힌 맨손으로 주변의 흙을 정신없이 걷어냈다. 짙은 흙더미 속에서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화려한 자개 장식이 박혀 있고 두꺼운 옻칠이 된 커다란 나무 궤짝이었다. 쇠로 된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그 궤짝은 오랜 세월 땅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기를 완벽히 차단하여 썩은 곳 하나 없이 온전하고 단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이것이 정녕 그 원혼 여인이 말한 재물이란 말인가….'

    돌쇠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궤짝의 크고 무거운 자물쇠 잠금장치를 더듬었다. 쇠로 된 자물쇠는 이미 녹이 슬어 붉게 부식되어 있었다. 돌쇠가 주변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다 힘을 주어 내리치고 비틀자, 자물쇠는 '툭' 하고 덧없이 부러져 나갔다.

    끼기기긱-

    육중한 궤짝의 뚜껑을 두 손으로 받쳐 들어 밀어 올리는 순간, 돌쇠는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궁이 틈새로 새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열린 궤짝 안을 비추자, 그 안에서 눈이 멀어버릴 듯 눈부시고 찬란한 은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처님, 옥황상제님… 이게 정녕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 눈이 멀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어른의 커다란 주먹만 한 은괴들이 거대한 궤짝 안에 빈틈없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평생 남의 집 마당을 쓸고 머슴살이를 하며 뼛골이 빠지게 일해도 엽전 몇 뢴 만져보는 게 고작이었던 돌쇠였다. 하루 세끼 풀죽으로 연명하며 고깃국 한 번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가난한 사내의 눈앞에 펼쳐진 저 은괴들은, 그가 백 번을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 일한다 해도 만져보지 못할 어마어마하고 천문학적인 양이었다. 심장이 커다란 북을 치듯 귓가에서 쿵쾅거렸고, 극도의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아찔해지며 핑 돌았다.

    그러나 돌쇠를 진정으로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괴들 사이에는 습기를 막기 위해 두꺼운 기름종이로 겹겹이 밀봉된 커다란 문서 뭉치가 다발로 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종이 뭉치를 펼쳐본 돌쇠의 두 눈이 이내 튀어나올 듯 크게 떠졌다. 그것은 이 고을 일대는 물론이고, 이웃 수십 고을에 걸쳐 있는 드넓고 기름진 논밭과 야산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수십 장의 관인 찍힌 토지 문서였다.

    눈이 뒤집힌 도적 떼들이 현물과 비단만을 노리느라 바닥 아래 치밀하게 숨겨진 이 공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남겨둔 덕분에, 대대로 덕을 쌓아온 한 거대한 가문의 막대한 부가 고스란히 이 캄캄한 흙 속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돌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궤짝을 멍하니 바라보며 숨을 헐떡였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충격, 그리고 이 큰돈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것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머슴살이를 당장 청산하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짓고 비단옷을 입으며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아니, 만석꾼 부럽지 않은 조선 팔도 제일의 큰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수만 가지 화려한 상상이 피어오르던 그때였다. 돌쇠의 시선은 이내 방문 너머 마루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이 벗어둔 낡은 겉옷으로 감싸인 유골 꾸러미로 향했다.

    그 엄청난 재물 앞에서도 돌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끈적한 탐욕보다 먼저 맑게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을지언정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원통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숙연함이었다. 돌쇠는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궤짝의 뚜껑을 덮고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5: 장례와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위한 구휼

    장맛비가 완전히 물러가고 맑게 갠 하늘 아래, 묵직한 궤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조심스레 유골을 품에 안은 채 산을 내려온 돌쇠는 가장 먼저 고을에서 제일가는 장의사를 찾아갔다. 허름하고 낡은 무명옷을 입고 흙투성이가 된 돌쇠가 장의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장의사는 그를 동냥아치나 남루한 머슴이라 얕잡아보며 손사래를 치며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돌쇠가 말없이 품속에서 번쩍이는 커다란 은괴 하나를 툭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자, 장의사의 태도는 순식간에 땅에 엎드릴 듯 돌변했고 그의 두 눈은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내 당장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이 은괴를 값으로 치를 터이니, 가장 질 좋은 관솔로 짠 최고급 관 두 개를 준비해 주시오. 그리고 당장 수소문하여 이 고을에서 제일 양지바르고 풍수지리가 기가 막힌 명당자리를 찾아내시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고 은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 더 내어줄 테니, 억울하게 가시는 길에 티끌만 한 한이나 서러움도 남지 않도록 고을에서 가장 훌륭한 장례를 치러주어야겠소."

    그 길로 돌쇠는 고을의 촌로들과 관아의 아전들을 찾아다니며 유골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만한 단서를 수소문했다. 그 결과, 그 산속의 거대한 폐가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을에서 가장 인심 좋고 덕망 높기로 소문났던 '최 진사' 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끔찍한 산적 떼의 습격으로 하룻밤 새 멸문지화를 당하고 흉가가 되어버렸다는 슬픈 사연에 사람들은 혀를 찼다. 돌쇠는 최 진사 부부의 억울한 혼을 달래기 위해 고을에서 가장 큰 절의 고승들을 모셔와 사흘 밤낮으로 성대한 천도재를 지냈다.

    향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산천을 울렸고, 슬퍼해 줄 혈육 하나 남지 않은 쓸쓸한 무덤 앞에서 돌쇠는 상복을 입고 엎드려 친부모를 잃은 자식처럼 서럽고도 뜨겁게 곡을 했다.

    "어르신… 마님… 이제 이승에서의 모든 원한과 참혹한 기억은 저 차가운 땅속에 묻어버리시고, 부디 두 분이 손을 맞잡고 함께 극락왕생하십시오. 제게 남겨주신 이 과분한 은혜는 결코 제 한 몸 배불리는 데 허투루 쓰지 않고, 평생을 두고 바르고 귀하게 쓰겠습니다."

    성대한 장례를 무사히 마친 후, 객주에 머물던 돌쇠는 남은 산더미 같은 은괴와 수십 장의 토지 문서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엄청난 재물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한양으로 올라가 고대광실을 짓고 기생들을 끼며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 밖 고을의 참담한 풍경이었다. 유례없는 긴 장마와 끔찍한 홍수, 그리고 이어진 지독한 흉년으로 인해 거리에 나앉아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다 못해 진흙을 뭉쳐 파먹는 아이들의 퀭하게 죽어가는 눈망울, 그리고 굶어 죽은 자식의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어미의 통곡 소리를 들으며, 돌쇠는 자신이 평생 겪어온 지독한 굶주림과 가난의 뼈저린 고통을 뼈아프게 떠올렸다.

    '내 어찌 이 막대한 재물을 나 혼자 배불리고 비단옷을 입는 데에만 쓸 수 있겠는가. 생전 그토록 인심 좋았다는 최 진사 어르신 부부께서 나 같은 비천한 자에게 이 큰 재물을 온전히 넘겨주신 것은, 필시 억울하게 죽어간 당신들을 대신해 이 고통받는 세상에 덕을 베풀고 사람을 살리라는 하늘의 뜻일 게다.'

    그날 밤으로 돌쇠는 흔들림 없는 결단을 내렸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최 진사 댁의 남은 토지 문서 중 절반을 관아로 들고 가 고을 사또 앞에 내놓았다. 그 땅에서 나오는 모든 소출을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쓰도록 관아에 헌납한 것이다. 또한, 남은 은괴들을 수레에 싣고 이웃 고을과 먼 장터까지 샅샅이 돌며, 돈을 아끼지 않고 쌀과 곡식을 모조리 사들여 고을로 운반해 왔다.

    그는 고을 한가운데 커다란 공터에 장작을 쌓고 집채만 한 큰 가마솥 수십 개를 걸었다. 그리고 고을의 아낙들을 품삯을 주고 고용하여 매일같이 쌀밥과 고깃국을 지어 굶주린 자들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의 구수한 냄새가 굶주림에 지친 고을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자, 천천히들 드시오! 쌀과 고기는 아직 창고에 차고 넘치게 넉넉하니 급하게 먹다 체하지 마시고, 뒤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배불리 드실 수 있소! 아이들에게는 국물을 넉넉히 퍼 주시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 그릇을 받아 든 백성들은, 믿기지 않는 따뜻한 온기에 눈물을 쏟으며 돌쇠의 발밑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아이고, 은인 나리! 생불이십니다요! 나리께서 우리 불쌍한 식구들을 지옥 구덩이에서 살리셨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우리를 어찌 이리 거두어 주십니까! 이 큰 은혜를 어찌 다 갚는단 말입니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곡소리 같은 감사 인사에, 돌쇠는 펄쩍 뛰며 그들의 거친 손을 맞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이러지들 마시오! 나도 당신들처럼 남의 집 머슴살이하던 천한 놈이오! 이 음식과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돌아가신 산속 폐가의 최 진사 어르신 부부께서 여러분을 위해 남기신 것이오. 나는 그저 그분들의 뜻을 대신 전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니, 나에게 절을 할 것이 아니라 정 감사하려거든 저기 산중턱 최 진사 댁 무덤을 향해 묵념이나 한 번씩 올려주시오."

    자신이 베푼 엄청난 구휼의 공을 모두 죽은 원혼들에게 돌리며 끝내 겸손함을 잃지 않는 돌쇠의 갸륵하고 고결한 마음씨는, 이내 입에서 입을 타고 바람처럼 온 고을과 이웃 고을에까지 멀리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그를 하늘이 내린 의인이자 보살이라 칭송했고, 매일 밥을 먹기 전 최 진사 부부의 명복을 비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돌쇠의 이 거대한 선행과 고을 사람들의 진심 어린 기도는, 차가운 흙 속에 잠든 최 진사 부부의 남은 원한마저 따뜻한 봄눈 녹듯 완벽하게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 6: 원혼의 은혜로 고을 최고의 만석꾼이 된 머슴

    그로부터 강산이 변한다는 십수 년의 긴 세월이 물 흐르듯 흘렀다.

    과거 폭우와 비바람을 피해 귀신 들린 폐가로 숨어들었던 비루하고 헐벗은 머슴 돌쇠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을에서 제일가는 너른 기와집 마당에서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맞으며 기품 있게 거니는 중년의 신사가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점잖은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 사내가 바로 이 고을에서, 아니 인근 수십 고을을 모두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거대한 대지주이자 만석꾼인 '김 대감'이었다.

    비록 그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과거를 보아 벼슬을 얻은 적도 없었으나, 그의 바다처럼 깊은 인품과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끝없이 베푸는 선행 덕분에 고을의 깐깐한 사또마저 그를 '대감'이라 부르며 상석을 내어주고 깎듯이 예우했다. 김 대감의 거대한 곳간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없었고, 그 문은 언제나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로 흉년이 들면 소작농들에게서 단 한 톨의 소작료도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이듬해 농사를 지을 씨앗과 새 농기구까지 거저 내어주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고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 안방에 조상님의 위패 대신 김 대감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다 바치며 그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어줄 정도로 그를 깊이 따르고 존경했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올해도 대풍년입니다요! 보십시오, 이 알곡이 꽉 찬 것들을!"

    가을걷이를 무사히 마친 소작농들이 수확한 누런 곡식을 수레에 가득 싣고 와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의 검게 탄 얼굴에는 과거 흉년 때 보았던 죽음과 가난의 그늘 대신, 삶에 대한 강한 희망과 넉넉한 활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김 대감, 아니 돌쇠는 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마당으로 내려가 소작농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하나하나 맞잡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내 덕이라니, 당치도 않네. 이 튼실한 곡식들은 모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논밭에서 피땀 흘린 자네들의 고귀한 땀방울 덕분이지. 올 한 해 비바람 견디며 농사짓느라 참으로 고생 많았네. 오늘 저녁엔 내 특별히 곳간을 크게 열어 갓 찧은 윤기 나는 햅쌀로 떡을 찌고, 살진 돼지를 잡아 고깃국을 넉넉히 끓여 마을 잔치를 크게 열 터이니,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들 모두 데리고 와서 오늘 밤은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춤추며 즐기시게나!"

    "아이고, 대감마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만수무관 하십시오!"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며 물러가는 사람들의 기뻐하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돌쇠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저 멀리 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양지바른 무덤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매년 명절은 물론이고 최 진사 부부의 기일과 자신의 생일마저도 그가 직접 하인들을 물리고 홀로 올라가 벌초를 하고 정성껏 제사를 모시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어르신, 부인. 두 분께서 그 비 내리던 밤, 두려움에 떨던 저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믿음과 은혜 덕분에, 이 부족하고 천한 놈이 사람 구실을 하며 수많은 불쌍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흙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시던 두 분의 한은, 이제 제가 세상에 흩뿌린 저 아이들의 웃음꽃과 백성들의 노랫소리로 모두 피어났으니… 부디 저 높은 하늘에서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히 굽어살펴 주십시오.'

    어디선가 시원하고 따스한 가을바람이 훅 불어와 돌쇠의 넉넉한 옷자락을 부드럽게 흔들고 지나갔다. 마치 그 옛날, 폭우가 쏟아지던 캄캄한 폐가의 안방에서 들려왔던 여인의 안도 섞인 마지막 속삭임처럼,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한밤중 찾아온 소름 끼치고 두려운 원혼을 모른 척 피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의 억울한 슬픔을 위로해 준 착하고 용기 있는 머슴 돌쇠. 그는 도망치는 본능 대신 측은지심을 선택했고, 그 결과 하룻밤 사이에 기적처럼 만석꾼의 막대한 재물을 얻었다. 하지만 진정 그를 온 고을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만석꾼으로 만든 것은 흙더미 속에 숨겨진 궤짝 안의 은괴가 아니라, 그 귀한 재물을 세상의 굶주린 이웃들과 기꺼이 나눌 줄 알았던 그의 따뜻하고 고결한 마음씨였다. 돌쇠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세월이 십수 년, 아니 백 년이 흘러도 고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해지며, 진정한 부의 가치와 선행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따스한 전설로 영원히 남았다.

    유튜브 엔딩 멘트

    오늘 준비한 노다지 야담, '과부의 빈방에서 하룻밤 잔 머슴' 이야기, 재미있게 들으셨나요? 두려움을 이겨낸 착한 마음씨가 진정한 기적과 부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네요. 구독자님들께도 오늘 밤, 돌쇠처럼 대박 나는 기분 좋은 횡재운이 찾아가길 바랍니다! 영상이 유익하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따뜻한 댓글 부탁드리며, 다음 시간에도 더욱 신비롭고 재미있는 부자 되는 옛날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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