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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기생의 하룻밤 은밀한 유혹을 뿌리치고 얻어낸 천금의 보물 상자 《패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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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킹멘트
천하를 호령하는 콧대 높은 최고 기생의 치명적인 유혹! 하지만 돈 많은 양반들의 재물도 마다하고 꼿꼿하게 지조를 지킨 한 장똘뱅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우직함에 감복한 기생은 하룻밤 정사를 나눈 뒤, 평생 숨겨둔 천금의 비자금 상자를 통째로 안겨주게 되는데요. 과연 기생의 은밀한 정보력과 장똘뱅이의 상술이 만나 어떤 기적을 만들어냈을까요? 지금부터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1: 장터의 억척스러운 장똘뱅이 만덕과 평양 최고의 명기 설화의 우연한 만남.
조선 팔도에서 가장 물산이 풍부하고 사람의 왕래가 잦다는 평양성 안의 난장. 이른 아침부터 짙게 깔린 물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장터는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인파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시뻘건 숯불 위에서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국밥의 구수한 냄새, 갓 잡아 올린 대동강 잉어의 펄떡이는 비릿함, 그리고 눈이 시리도록 화려한 비단 무지개가 넘실거리는 포목전의 풍경까지.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삶의 활기가 온통 뒤엉킨 거대한 용광로와도 같았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악다구니와 짐꾼들의 거친 숨소리가 교차하는 그 왁자지껄한 장터 한복판에,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헌칠한 사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만덕. 나이는 서른 남짓에, 어깨에는 제 몸집만 한 커다란 봇짐을 짊어지고 손에는 굵은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쥔 전형적인 장똘뱅이였습니다.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번쩍이는 피부와 다부진 골격은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 거친 비바람을 맞으며 팔도를 유랑했는지 짐작하게 해주었지요. 만덕은 번듯한 상전 하나 없이 이 장 저 장을 떠도는 신세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깊은 산속을 호령하는 젊은 호랑이처럼 맑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는 셈이 비상하게 빠르면서도 억척스러웠고, 남들보다 세 배는 무거운 짐을 지고 네 배는 먼 길을 걷는 지독한 사내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장사치라면 으레 가질 법한 탐욕이나 교활함이 없었습니다.
'장사치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얄팍한 속임수로 당장의 푼돈을 쥘 수는 있겠으나, 한 번 잃어버린 신용은 억만금을 주고도 다시 살 수 없는 법. 내 비록 등짐을 지고 흙바닥을 구르는 천한 장똘뱅이일지언정,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이문은 취하지 않으리라.'
그것이 바로 만덕이 십수 년간 거친 상단 무리 속에서 살아남으며 단 한 번도 꺾지 않은 굳은 신념이었습니다. 방금 전에도 만덕은 셈을 잘못하여 엽전 두어 닢을 더 내고 돌아서던 노파를 굳이 수십 보나 쫓아가 그 돈을 쥐여주고 돌아오는 참이었습니다. 주변의 닳고 닳은 장사치들이 그를 보며 미련한 놈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지만, 만덕은 그저 빙긋 웃어 넘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정오 무렵, 평화롭고 분주하던 장터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멀리서부터 요란한 징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건장한 호위 무사들과 기생 오래비들이 길을 트며 거대한 가마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러서라! 비켜라! 아씨의 행차시다!"
앞장선 자들의 거친 호통에, 물건을 팔던 상인들도 길을 가던 백성들도 황급히 짐을 챙겨 길섶으로 비켜서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 화려한 여덟 명의 가마꾼이 어깨에 멘 옥교 안에는, 평양 바닥을 넘어 조선 천지에서 그 이름만 들어도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제일의 명기, 설화가 타고 있었습니다. 설화는 그 미모가 倾국지색(경국지색)일 뿐만 아니라, 붓을 들면 당대의 명필들이 울고 가고 거문고를 타면 하늘의 선녀들조차 넋을 잃는다는 전설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콧대 높기로 소문난 한양의 고관대작들조차 그녀의 치맛자락 한 번 스쳐보겠다고 수천 냥의 재물을 수레로 싣고 평양으로 내려왔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 밤 평양 감영에서 열리는 대규모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단장을 마친 그녀가 움직이자, 장터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습니다.
가마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주렴 너머로, 설화는 무심한 눈동자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자신의 삶과는 달리, 그녀의 텅 빈 가슴속에는 끝없는 환멸과 고독만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돈과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환심을 사려는 속물적인 사내들의 뻔한 수작질에 신물이 난 지 오래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행렬이 장터의 중심인 큰길 교차로를 지나려 할 무렵, 평소 장터 상인들의 피땀을 뜯어먹고 살며 관아의 하급 관리들과 결탁해 악명을 떨치던 왈패 무리 대여섯 명이 술에 잔뜩 취한 채 길 한가운데를 막아서고 섰습니다. 그들은 설화의 가마인 줄 뻔히 알면서도 호기를 부리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에헤이! 길이 좁아 빠져서 우리가 지나갈 틈이 없구나! 아무리 평양 제일가는 기생년의 가마라지만, 이 대낮에 이리 요란을 떨며 장바닥을 흙먼지투성이로 만들면 쓰나! 가마를 멈추고 술값이나 두둑이 내놓고 가거라!"
호위 무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으나, 왈패들은 관아의 뒷배를 믿고 더욱 기고만장하게 날뛰었습니다. 가마꾼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행렬이 완전히 멈춰 섰을 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바로 만덕이었습니다. 무거운 봇짐을 맨 땅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만덕은, 호랑이가 포효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왈패들을 향해 호통을 쳤습니다.
"이놈들아! 대낮부터 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기어이 눈에 뵈는 것이 없느냐! 이곳은 수백 명의 상인들이 피땀 흘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신성한 장터이다! 어딜 감히 시정잡배 놈들이 길을 막고 선량한 이들의 통행을 방해하며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당장 그 더러운 발을 치우고 썩 물러가지 못할까!"
만덕의 불호령이 어찌나 크고 매서웠던지, 장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왈패의 우두머리가 코웃음을 치며 만덕의 멱살을 잡으려 다가갔습니다.
"이런 미친 장사치 놈이 돌았나. 네놈이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느냐?"
하지만 만덕은 피하기는커녕 두 눈을 부릅뜨고 우두머리의 손목을 낚아채어 강하게 비틀어버렸습니다. 우두머리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자, 만덕은 들고 있던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치며 호령했습니다.
"관아의 뒷배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내 오늘 장사를 공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고야 말겠다! 사내자식들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디서 힘없는 자들에게 행패냐!"
그 당당하고 꺾임 없는 기백에 왈패들은 겁을 먹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장터에는 일순간 통쾌한 정적이 흘렀고, 이내 상인들의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만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먼지를 털고 다시 무거운 봇짐을 어깨에 둘러메었습니다.
가마 안에서 주렴을 살짝 걷어 올린 채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설화의 두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습니다. 투박한 삼베옷에 낡아빠진 짚신을 신은 비천한 행색이었지만, 저 사내의 넓은 어깨와 당당한 기개, 그리고 불의 앞에서도 한 치의 비굴함 없이 번쩍이던 두 눈동자는 설화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정한 대장부의 그것이었습니다. 권력 앞에서는 비굴하고 약자 앞에서는 잔인하던 수많은 양반들의 민낯과 너무도 대비되는 숭고한 모습이었지요.
'참으로 기이한 사내로구나... 저리도 척박한 삶을 살면서도 어찌 저토록 눈빛이 맑고 기개가 드높단 말인가.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썩어문드러진 양반네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짜 사내로다.'
설화는 봇짐을 지고 인파 속으로 멀어지는 만덕의 듬직한 뒷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쫓았습니다. 그녀의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심장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랜만에 뜨거운 불씨 하나가 탁 하고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평양성 장터 바닥을 구르는 일개 장똘뱅이 만덕과, 구름 위의 꽃이라 불리던 최고 기생 설화의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되는 찬란한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 2: 권세가들의 검은 유혹과 거액의 뇌물을 단호히 거절하는 만덕의 곧은 지조.
장터에서 왈패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홀연히 사라진 장똘뱅이 만덕의 무용담은 발 없는 말이 되어 평양성 안팎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셈이 비상하게 빠르고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불의를 보고 참지 않는 담력을 지녔다는 소문은 시장통 상인들의 입을 거쳐 어느새 높은 담장 너머 양반들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지요. 특히 그 소문에 가장 크게 귀를 틔운 자는 평양성 제일의 거부이자 탐관오리의 수괴로 악명 높은 최 대감이었습니다. 최 대감은 겉으로는 점잖은 양반 행세를 하였으나, 뒤로는 청나라 상인들과 결탁하여 나라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밀수품을 몰래 들여와 폭리를 취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뒷거래를 흠집 없이 처리해 줄, 입이 무겁고 배짱 두둑한 수족이 늘 목마르던 참이었습니다.
어느 날 늦은 오후, 만덕이 장터 구석에서 해진 짚신을 갈아 신고 있을 때, 건장한 체구에 험악한 인상을 한 사내 둘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만덕의 봇짐을 빼앗아 들고는 억지로 그를 끌고 평양성에서 가장 으리으리하다는 최 대감의 저택으로 향했습니다. 기와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마당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대저택의 솟을대문을 넘어서자 묵직한 위압감이 만덕의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만덕은 호랑이 굴에 끌려온 짐승처럼 떨지 않고, 오히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당당한 걸음으로 사랑채로 들어섰습니다.
넓은 사랑채 안에는 진귀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침향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바닥에는 호피 무늬 방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거만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있던 최 대감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만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습니다. 최 대감 앞에는 최고급 청나라산 비단 수십 필과 함께,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이는 은덩이와 엽전 꾸러미가 마치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보통의 평민이나 장사치였다면 그 어마어마한 재물의 광채에 시력을 잃은 듯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겠지만, 만덕의 두 눈동자는 그 은덩이들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요했습니다.
"네놈이 바로 장터에서 그리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그 장똘뱅이 만덕이냐? 내 듣자 하니 네놈의 발품이 팔도에서 가장 빠르고, 물건을 보는 눈썰미가 귀신같다더구나. 게다가 왈패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담력까지 갖췄다지."
최 대감이 부채를 탁 접으며 거만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소인은 그저 등에 짐을 지고 이 장 저 장을 떠도는 비천한 장사치일 뿐이옵니다. 대감마님처럼 귀하신 분께서 어찌 저 같은 천것을 부르셨는지 연유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만덕이 정중하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로 답하자, 최 대감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산처럼 쌓인 은덩이들을 가리켰습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네놈의 그 쓸만한 재주를 이제 흙바닥이 아닌 내 밑에서 써야겠다. 내달 초, 의주 국경을 넘어 청나라 상단이 몰래 들여오는 진귀한 물건들이 당도할 것이다. 나라에서는 금하는 물품이나, 한양의 고관대작들은 돈을 싸 들고도 못 구해서 안달인 물건들이지. 네가 그 물건들을 은밀히 인수하여 한양의 내 수족들에게 넘기는 유통을 책임져 다오. 네놈의 기동력과 셈법이라면 관군의 눈을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터. 여기 있는 이 거대한 재물은 네놈이 내 수족이 되겠다는 맹세의 징표이자 첫 수고비니라. 이것만 있으면 평생 그 무거운 봇짐을 내려놓고 번듯한 기와집에서 기생을 끼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떠냐?"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유혹이었습니다. 평생 짚신을 스무 켤레나 닳게 하며 팔도를 돌아도 결코 만져볼 수 없는 거액이 눈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덕은 최 대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탐욕이로다. 나라의 녹을 먹는 양반이란 자가 밀수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나라의 기강을 뒤흔들려 하다니. 내 아무리 굶어 죽을지언정 저런 더러운 재물에 손을 댈 수는 없다.'
"대감마님, 소인이 비록 글을 읽지 못한 무지렁이 장사치오나, 장사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배웠사옵니다. 제힘으로 땀 흘려 얻은 정당한 이문이 아니면 취하지 않는 것이 소인의 철칙이옵니다. 하물며 나라의 법을 어기고 백성을 기만하는 밀수에 손을 대어 얻은 더러운 재물이라면, 억만금이 주어진다 한들 소인은 절대 받을 수 없사옵니다. 대감마님의 제안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나이다."
만덕의 차갑고도 단호한 거절에 사랑채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최 대감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고, 곁에 있던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칼자루를 부여잡으며 만덕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습니다.
"네, 네 이놈!! 감히 천하의 미천한 장똘뱅이 주제에 내 호의를 거절해? 정녕 네놈이 목숨이 두 개라도 된단 말이냐! 당장 내 명을 따르지 않으면 네놈을 반역의 무리로 몰아 목을 쳐 저잣거리에 매달 것이다!"
최 대감의 호통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지만, 만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습니다.
"대감마님께서 제 목숨을 거두신다면 힘없는 소인은 기꺼이 내어놓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허나, 부정한 짓에 가담하여 평생 양심의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사느니, 차라리 떳떳한 장사치로 죽는 길을 택하겠나이다. 뜻을 굽히지 못하는 저를 당장 베시옵소서!"
사나운 맹수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만덕의 기개에 최 대감은 오히려 기가 질려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칼을 뽑아 당장이라도 칠 기세였지만, 평양성 내에 소문이 자자한 자를 뚜렷한 명분 없이 대낮에 자신의 집에서 죽였다가는 뒷말이 무성해질 것을 염려한 최 대감은 씩씩거리며 손을 휘저었습니다.
"이, 이 빌어먹을 고집불통 놈! 그래, 네놈이 언제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썩 꺼지거라!"
만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당한 걸음으로 사랑채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살벌한 대화는, 마침 최 대감의 부름을 받고 사랑채 안방의 병풍 뒤에 숨죽여 대기하고 있던 기생 설화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설화는 병풍의 미세한 틈 사이로, 산더미 같은 재물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돌아서는 만덕의 넓은 등판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사내가... 정녕 이런 대장부가 아직 조선 천지에 살아있었단 말인가.'
수많은 권세가들이 돈과 권력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 꿇고, 자신의 미색 앞에서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구는 것만 평생 보아왔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똘뱅이는 달랐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저 우직함. 설화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가슴 위로 두 손을 모은 채 붉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습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심을 내어준 적 없던 조선 최고의 명기 설화의 가슴속에, 장똘뱅이 만덕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 3: 만덕의 우직함에 호기심을 넘어선 감동을 느낀 설화의 비밀스러운 초대.
최 대감의 거액을 단칼에 거절하고 저택을 빠져나온 만덕은 그 길로 객주로 돌아와 서둘러 봇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그였지만, 평양성의 실세인 최 대감의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고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자객이 들이닥쳐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당장 오늘 밤을 틈타 평양성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몸을 피할 요량이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객주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 만덕이 막 문을 열고 나서려던 찰나였습니다. 누군가 문밖에서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만덕은 본능적으로 곁에 둔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움켜쥐며 숨을 죽였습니다.
"누구시오?"
"나리,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해치려는 자가 아니옵니다."
들려온 것은 가늘고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였습니다. 만덕이 경계를 풀지 않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 짙은 향내를 풍기는 검은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방 안으로 재빨리 들어와 쓰개치마를 벗어 내렸습니다. 다름 아닌, 낮에 장터에서 마주쳤던 가마 행렬의 주인공이자 평양 제일의 기생 설화의 몸종이었습니다.
"네년은 어찌하여 한밤중에 이 누추한 곳을 찾았느냐? 나는 도망칠 길을 재촉해야 하니 어서 비켜라."
만덕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몸종은 다급히 바닥에 엎드리며 간청했습니다.
"나리, 저희 아씨께서 나리를 간절히 모셔 오라 하셨사옵니다. 뒷문으로 가마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한 번만 발걸음을 해주옵소서. 나리의 목숨이 달린 중대한 일이라 하셨사옵니다."
만덕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천한 장사치를 조선 최고의 명기가 부를 리 만무했습니다.
'이것 필시 최 대감이 나를 해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 기생년들을 미끼로 나를 유인하여 죽이려는 수작이 분명해.'
만덕은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으나, 묘하게도 어제 장터에서 가마 주렴 틈으로 마주쳤던 그 기생의 쓸쓸하고도 깊은 눈동자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만약 이것이 함정이라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 결판을 내는 것이 장사치의 배짱이 아니겠는가. 만덕은 봇짐을 내려놓고 몸종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둠을 틈타 비밀스럽게 도착한 기방의 뒷문. 만덕은 화려한 촛불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기방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자, 코끝을 스치는 아찔한 매화향과 함께 은은한 옥비녀를 꽂고 얇은 비단 치마를 두른 설화가 비단 방석 위에 다소곳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최상급의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고, 촛불에 비친 설화의 자태는 감히 인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눈부시고 관능적이었습니다.
만덕은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지 않고 문지방에 선 채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기방의 문턱을 밟아본 적 없는 촌놈이오. 이런 화려한 자리는 나 같은 장똘뱅이에게 어울리지 않소. 함정이라면 당장 자객을 부르시고, 그게 아니라면 나를 부른 연유나 짧게 묻고 가겠소."
설화는 만덕의 무뚝뚝한 반응에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버선발로 사뿐사뿐 다가와 만덕의 굳게 쥔 소맷자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끌어당겼습니다.
"이리 안으로 드시지요. 낮에 최 대감댁 사랑채에서 뵈었던 나리의 대장부 같은 기개에 제 가슴이 몹시도 뛰었사옵니다. 수많은 사내들이 저를 품기 위해 천금을 싸 들고 오지만, 제 눈에는 그들 모두가 재물에 눈이 먼 짐승들로만 보였사옵니다. 허나 나리는 다르시더군요. 오늘 밤, 소녀가 나리를 온 마음을 다해 모시고 싶사옵니다."
설화의 붉은 입술이 만덕의 귀가에 닿을 듯 다가왔고,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만덕의 거친 팔에 밀착되었습니다. 평양 감사조차 섣불리 안아보지 못했다는 천하일색의 노골적이고도 치명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사내로서 어찌 그 향기와 숨결에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덕의 거친 호흡이 잠시 흔들렸고, 주먹을 쥔 손에 땀이 배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번쩍 차린 만덕은 설화의 어깨를 밀어내며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섰습니다.
"아씨, 뭔가 사람을 크게 잘못 보신 모양이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천한 떠돌이일 뿐이오. 아씨처럼 하늘의 구름 위에 계신 분이 내게 이러는 것은 필시 나를 조롱하거나 시험하려는 헛된 장난일 터. 사내의 하룻밤 욕정으로 아씨를 품는다 한들, 내일이면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시 등짐을 메고 떠나야 할 처지오. 헛된 마음으로 사람의 진심을 어지럽히지 마시오."
만덕의 꾸짖음은 매섭고도 단호했습니다. 미색에 홀려 이성을 잃는 뭇 사내들과 달리, 끝까지 자신의 처지를 알고 도리를 지키려는 만덕의 우직함에 설화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서 기방 생활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가식 없는 진실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습니다.
'아아... 정녕 이 사내는 억만금의 재물 앞에서도, 천하를 기울게 할 미색 앞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구나. 내 평생을 바쳐 섬길 주인을 비로소 만났도다.'
설화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만덕의 발앞에 그대로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나리, 소녀의 방자함을 용서하시옵소서. 나리를 시험하려 한 것이 아니오라, 평생을 썩은 물속에서 살아온 소녀가 드디어 진정한 사내를 만난 기쁨에 주체를 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소녀는 오늘 밤 나리께 제 육신이 아닌, 제 운명과 영혼을 통째로 바치고자 부른 것이옵니다. 부디 소녀의 이 간절하고도 외로운 마음을 치우지 마시고, 곁을 내어주시옵소서."
눈물로 호소하는 설화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만덕은 그녀의 진심 어린 눈물을 보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단순한 육체의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허상과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험난한 풍파를 홀로 견뎌온 두 외로운 영혼이 마침내 서로를 깊이 알아보는 숭고하고도 거룩한 순간이었습니다. 만덕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엎드려 있는 설화의 옥 같은 두 손을 굳게 맞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날 밤, 기방의 은밀한 내실에서는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는 가장 뜨겁고도 순수한 정분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 4: 하룻밤의 깊은 정, 그리고 설화가 건넨 천금의 보물상자와 정보 장부.
어둠이 걷히고 기방의 창호지 너머로 희스름한 새벽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밤새 피워둔 침향의 잔향이 옅게 감돌고 있었고, 두 사람의 거친 숨결이 잦아든 자리에는 묘한 평온함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거친 장터 바닥을 구르며 굳은살이 박인 장똘뱅이의 투박한 손과, 화려한 기방에서 뭇 사내들의 가식적인 미소만을 받아내던 기생의 부드러운 손이 깍지를 낀 채 굳게 얽혀 있었습니다. 밤새 뜨거운 정을 나누며 두 사람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살아온 인고의 세월과 가슴속 깊은 곳에 맺힌 한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지요.
만덕의 널찍한 가슴에 안겨 있던 설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그녀의 표정에는 간밤의 몽환적인 춘정(春情)은 온데간데없고,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내린 듯 결연하고도 맑은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설화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 내실 한구석에 놓인 육중하고 화려한 자개장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품속에서 작은 은쇠대(열쇠)를 꺼내어 자개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 문을 열자, 그 안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검은 옻칠 상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설화는 두 손으로 조심스레 상자를 안아 들고 와 만덕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오?"
만덕이 의아한 눈빛으로 묻자, 설화는 떨리는 손으로 첫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순간, 새벽빛을 받은 상자 안에서 눈이 시리도록 영롱한 금빛과 은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안에는 조선 팔도 어디서도 쉽게 구하지 못할 최상급의 금괴와 묵직한 은덩이들이 빈틈없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평생을 장사하며 엽전 몇 닢의 이문에 울고 웃던 만덕조차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실 정도로 거대한 재물이었습니다.
"이... 이 큰 재물이 어찌 아씨의 방에 있단 말이오?"
"소녀가 기방에 팔려 온 지 십수 년... 겉으로는 양반들의 비위를 맞추며 웃음을 팔았으나, 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며 푼푼이 모아둔 제 전 재산이옵니다. 언젠가 이 지옥 같은 기방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 날을 꿈꾸며 목숨처럼 지켜온 것이지요."
만덕이 놀란 가슴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설화는 곧이어 두 번째 상자를 열었습니다. 금괴가 들어있던 상자보다 훨씬 낡은 그 상자 안에는 빛바랜 두툼한 책자 여러 권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리, 진정한 보물은 재물이 아니라 바로 이 상자 안에 있사옵니다."
"이건... 장부들이 아니오?"
"그렇사옵니다. 평양 감사는 물론이요, 한양의 권세가들과 내로라하는 거상들이 술에 취해 기방에서 흘린 온갖 은밀한 뒷거래, 관아의 매점매석 계획, 그리고 청나라 상단이 들여오는 밀수품의 경로와 품목들이 날짜별로 낱낱이 기록된 소녀만의 비밀 장부이옵니다. 저들은 기생 앞에서는 입조심을 하지 않는 법이지요. 이 정보만 있다면 조선 팔도의 상권을 손바닥 뒤집듯 쥐락펴락할 수 있사옵니다."
만덕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설화가 내어놓은 것은 단순한 재물과 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패한 조선 상권의 심장부를 찌를 수 있는 치명적인 무기이자, 한 밑바닥 장사치를 단숨에 천하의 거상으로 만들어 줄 거대한 날개였습니다. 만덕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덮으며 설화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리도 귀하고 무서운 물건을... 어찌 하룻밤 인연에 불과한 나에게 전부 내어준단 말이오. 내가 재물만 챙겨 도망이라도 치면 어찌하려고 이러시오."
설화는 흔들림 없는 맑은 눈동자로 만덕의 두 손을 꽉 쥐었습니다.
"소녀는 사람 보는 눈 하나로 이 험한 기방에서 살아남았사옵니다. 어제 최 대감의 수만 냥 앞에서도 의리를 지키시던 나리의 꼿꼿함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나리께서는 절대 배신할 분이 아니십니다. 나리께서 이 비자금과 정보를 거름 삼아 세상을 호령하는 거상이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구하여 나리의 곁에 평생토록 머물게 해 주시옵소서. 소녀의 모든 것을 나리의 발밑에 바치겠나이다."
설화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만덕에게 걸겠다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비천한 장사치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을 받아본 적 없던 만덕이었습니다. 만덕의 굳센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는 설화가 건넨 두 개의 상자를 단단히 품에 안으며 호랑이 같은 기백으로 맹세했습니다.
"당신의 그 깊은 한과 뼈아픈 눈물을 내가 어찌 모른 척하겠소. 내 비록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장돌뱅이지만,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은 절대 하지 않소이다. 당신이 내어준 이 칼과 방패로, 썩어빠진 양반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조선 최고의 상단을 세워 반드시 보답하리다. 그리고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받는 여인으로 만들어 주겠소!"
새벽빛이 두 사람의 굳게 맞잡은 손 위로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밑바닥 장똘뱅이의 억척스러운 상술과, 천하 명기의 치밀한 정보력이 하나로 뭉쳐 세상을 뒤흔들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는 장엄한 아침이었습니다.
※ 5: 기생 설화의 정보력과 만덕의 상술이 결합하여 상단을 키워나가는 과정.
설화가 자신의 운명과 함께 내어준 두 개의 상자는 그저 값비싼 재물과 낡은 종이뭉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밑바닥을 전전하며 흙먼지를 마시던 장똘뱅이 만덕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거대한 날개이자, 썩어 문드러진 조선의 상권과 부패한 권력의 심장부를 정조준할 수 있는 가장 무섭고도 예리한 비수였습니다. 만덕은 가장 먼저 설화가 모아둔 눈부신 금괴 중 일부를 헐어, 평양 감영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만큼 막대한 속전을 기방의 행수에게 치렀습니다. 평양 제일의 기생을 내어줄 수 없다며 펄펄 뛰던 기방 행수도, 눈앞에 쌓인 어마어마한 금괴의 광채 앞에서는 결국 두 손을 들고 기적(妓籍)에서 설화의 이름을 지워줄 수밖에 없었지요. 그토록 끔찍했던 기생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양민의 신분이 된 설화는, 화려한 비단옷과 무거운 가채를 벗어 던지고 단아한 명주 저고리에 소박한 비녀를 꽂은 채 만덕의 곁으로 왔습니다.
만덕은 평양성 외곽, 대동강의 물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너른 터와 거대한 창고를 매입하고 웅장한 기와집을 지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만설 상단(萬雪 商團)'이라는 깃발을 높이 내걸었습니다. 평생 등짐 하나에 의지해 팔도를 유랑하던 장똘뱅이가 하루아침에 대규모 상단의 단주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설화는 안채에 머물며 장부를 해독하고 상단의 굵직한 전략을 짜는 만덕의 가장 든든하고 지혜로운 참모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일전은 상단이 세워지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찾아왔습니다. 다가오는 동짓달, 조정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바칠 조공과 사신단을 파견할 예정이었는데, 설화가 건넨 비밀 장부에는 이와 관련된 아주 은밀하고도 놀라운 계획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양 감사가 사신단에 줄을 대어 한양의 고위 대신들에게 바칠 뇌물로 최고급 인삼과 호피를 은밀히 대량 매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물품의 독점 공급을 맡아 폭리를 취하려는 자가 바로 며칠 전 나를 회유하려다 실패했던 최 대감이다.'
만덕은 장부에 적힌 최 대감의 치밀한 매점매석 계획과 날짜, 그리고 거래가 이루어질 비밀 장소까지 낱낱이 파악했습니다.
"최 대감, 당신의 그 헛된 탐욕과 권력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내 똑똑히 보여주겠소. 진정한 상술이 무엇인지 천한 장사치의 매운맛을 보게 될 것이오."
만덕은 설화의 완벽한 정보망을 바탕으로 즉시 불같은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최 대감의 수하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한 날짜보다 열흘이나 앞서, 십수 년간 팔도를 떠돌며 의형제처럼 지내온 발 빠른 보부상들을 점조직으로 은밀히 풀었습니다. 만덕이 평소 푼돈의 이문에도 신용을 지키며 상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온 덕분에, 보부상들은 만덕의 지시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북부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호피와 산삼, 인삼을 시세보다 약간의 웃돈을 더 얹어주며 모조리 싹쓸이하여 사들였습니다. 그 막대한 자금은 설화가 건넨 상자의 은덩이들에서 나온 것이었지요.
질 좋은 물건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레에 실려 만설 상단의 거대한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이레가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뒤늦게 헐값에 물건을 거두어들이려 북쪽으로 올라간 최 대감의 수하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장의 씨가 완전히 말라버린 것은 물론이고, 물건을 구하려는 자들만 넘쳐나니 가격은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으니까요. 사신단이 출발할 날짜는 턱밑까지 다가왔고, 마음이 다급해진 평양 감영에서는 당장 약조한 진상품을 대령하라며 최 대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발등에 시뻘건 불이 떨어진 최 대감은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평양성 외곽에 새로 생긴 만설 상단이라는 곳에 호피와 인삼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 대감은 자신의 체면도 내팽개친 채 수하들을 보내 곱절의 곱절, 무려 네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웃돈을 주고 만설 상단의 물건을 눈물을 머금고 사들여야만 했습니다. 그 거래가 성사된 날 밤, 만설 상단의 안채에서는 통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크하하! 아씨, 아니 여보! 우리 상단이 불과 며칠 만에 벌어들인 돈이 평양 감영의 일 년 치 세수와 맞먹소이다! 저 교활한 최 대감이 제 꾀에 빠져 피눈물을 흘리며 은덩이를 바치는 꼴을 보았어야 했는데 말이오. 당신의 그 신묘한 장부가 아니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소!"
만덕이 산더미처럼 쌓인 은화 꾸러미를 보며 호탕하게 웃자, 설화는 조용히 향긋한 차를 따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습니다.
"나리의 흔들림 없는 뚝심과 팔도의 상인들을 움직이는 깊은 덕망이 없었다면, 이 장부 따위는 그저 불쏘시개로나 쓸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언제 물건을 찾을지, 길목을 어떻게 차단할지는 오롯이 나리의 뛰어난 상술 덕분이옵니다. 허나, 이제 고작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니 너무 일찍 마음을 놓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썩은 고기를 뺏긴 들개들은 반드시 이빨을 드러내고 반격해 올 것이니까요."
설화의 날카로운 지적대로였습니다. 그 이후로도 만덕은 장부에 낱낱이 기록된 고관대작들의 밀수 경로와 매점매석 계획을 언제나 한발 앞서 파악하고, 그들의 길목을 정확히 차단하며 거대한 부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양반들의 더러운 뒷거래를 귀신같이 꿰뚫어 보고 번번이 이문을 가로채는 만설 상단의 신출귀몰한 행보에, 평양의 부패한 권세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지요. 만덕의 억척스러운 실전 상술과 설화의 치밀하고도 방대한 정보력이 완벽하게 결합하자, 만설 상단은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조선 서북부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전설적인 거상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 6: 상권을 뺏긴 고관대작들의 음모와 만덕에게 닥친 투옥 위기.
만설 상단의 깃발이 평양성을 넘어 한양 삼거리까지 그 위세를 떨치며 승승장구할수록, 억울하게 이문을 빼앗긴 권세가들의 살의는 서늘한 독기가 되어 상단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는 법이고, 솟아오르는 빛이 강렬할수록 그 뒤에 지는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것이 세상의 잔인한 이치였지요. 평양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 대감을 비롯한 부패한 양반들은, 자신들의 치밀한 계획을 번번이 수포로 만들고 막대한 재물을 가로채는 만설 상단의 배후를 집요하게 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상단의 단주가 과거 자신의 거액을 단칼에 거절했던 그 괘씸하고 건방진 장똘뱅이 만덕이라는 사실과, 그 곁에 평양 감영의 온갖 은밀한 소문을 쥐고 흔들던 천하의 명기 설화가 함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감히 몸이나 팔던 기생년과 흙바닥을 구르던 천한 장사치 놈이 작당을 하여 우리 양반들을 능멸해? 감영의 비밀을 빼돌려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이문을 훔쳐간 죄, 결단코 살려두지 않겠다! 내 이놈들의 숨통을 잔인하게 끊어놓고 만설 상단의 억만금을 모조리 관노로 몰수하여 내 창고에 채워 넣을 것이다!"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최 대감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즉시 평양 감사와 은밀히 결탁하여, 만덕을 합법적으로 죽이고 상단을 통째로 집어삼킬 아주 치밀하고도 악랄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초여름의 장대비가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며 비바람이 몰아치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소란을 틈타, 만설 상단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제1창고에 복면을 쓴 수십 명의 괴한들이 은밀히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수레에 싣고 온 묵직한 나무 상자들을 창고 으슥한 곳에 잔뜩 쌓아두고는 유령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동이 채 트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명의 무장한 관군과 포졸들이 횃불을 들고 만설 상단의 대문을 요란하게 부수며 들이닥쳤습니다.
"이 상단의 단주 만덕이라는 역적 놈을 당장 포박하라! 감히 나라에서 엄격히 금한 청나라의 화승총과 무기류를 몰래 들여와 난을 꾀하려 한 대역죄를 묻겠다!"
"이게 대체 무슨 억지란 말이오! 우리 만설 상단은 오직 정당한 물품만을 취급할 뿐, 결단코 그런 무기류나 밀수품을 창고에 들인 적이 없소이다! 이는 필시 누군가의 모함이 분명하오!"
잠에서 깨어나 마당으로 뛰어나온 만덕이 거세게 항변했지만, 포졸들은 만덕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제1창고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괴한들이 숨겨두었던 나무 상자들을 기어이 찾아내어 마당에 내동댕이치듯 부수었습니다. 부서진 상자 안에서는 차갑게 번득이는 청나라제 화승총과 수많은 밀수 화약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완벽하게 짜인,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는 악랄한 덫이었습니다. 만덕은 억울함을 호소할 틈도 없이 포승줄에 꽁꽁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도록 흠씬 두들겨 맞고는 평양 감영의 깊고 축축한 옥창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안채에서 달려 나온 설화의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이룩한 거대한 꿈과, 마침내 찾아온 진실한 사랑이 탐욕스러운 양반들의 계략 앞에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옥에 갇힌 만덕은 그날부터 하루가 멀다고 참혹하고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어두컴컴한 고문실에는 살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최 대감은 옥좌에 거만하게 앉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와 살점을 뜯어내는 채찍으로 만덕을 유린하며 장부의 행방을 캐물었습니다.
"네놈이 어찌 우리들의 그 은밀한 거래를 미리 알고 선수를 쳤는지 바른대로 실토하라! 필시 그 요망한 기생년이 감영의 장부라도 훔쳐다 네놈에게 바쳤더냐! 당장 고변하고 상단의 전 재산을 내놓는다는 각서에 지장을 찍지 않으면, 내일 당장 네놈의 사지를 찢어 저잣거리에 매달고 그 기생년은 다시 관비로 끌고 가 평생 능욕을 당하게 만들 것이다!"
최 대감의 악랄한 협박 속에서도 만덕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면서도 짐승처럼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만큼은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여는 순간, 설화는 목숨을 잃거나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게 될 것이다. 장사치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억만금의 재물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 하였다. 내 비록 이 차가운 형틀에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목숨을 바쳐 내 여인만은 끝까지 지켜낼 것이다!'
만덕은 의식을 잃고 실신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습니다. 단주의 구속으로 만설 상단은 하루아침에 폐쇄되었고, 수백 명의 일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찢겨진 살갗 사이로 차가운 한기가 스며드는 옥바닥에 웅크린 만덕의 목숨은 이제 거센 비바람 앞의 가냘픈 등불과도 같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만덕의 숨통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조여오고 있었습니다.
※ 7: 설화의 치밀한 기지와 만덕의 뚝심으로 위기를 반전시키는 통쾌한 계략.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설화는 평범하고 나약한 아녀자들처럼 안방 구석에 틀어박혀 치맛자락을 붙잡고 통곡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상단이 짓밟히고 사랑하는 이가 차가운 감옥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핏발 선 두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차가운 얼음 같은 결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나리께서... 그 끔찍한 고문을 견디시면서도 나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끝내 입을 다물고 피를 흘리고 계신다. 이제는 내가 움직여야 할 때다. 내 목숨을 저승사자에게 구걸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나리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설화는 상단 곳곳에 흩어져 있던 남은 비자금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나머지 비밀 장부들을 단단히 기름종이에 싸서 품속 깊이 품었습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썩을 대로 썩어빠진 평양 감영이나 인근 관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날 밤, 천금을 주고 평양에서 가장 날쌔고 지구력이 좋은 준마 두 필을 구하여, 남장을 한 채 한양을 향해 목숨을 건 질주를 시작했습니다. 밥을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말 위에서 마른 육포를 씹으며,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린 설화의 허벅지는 찰과상으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입술은 하얗게 부르텄습니다.
마침내 한양에 당도한 설화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찾아간 곳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사헌부 대사헌의 엄숙한 사저였습니다. 대사헌 김 대감은 꼬장꼬장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과거 최 대감을 비롯한 평양 권세가들의 부패를 끊임없이 탄핵하며 그들과 날 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조정의 몇 안 되는 청백리(淸白吏)였지요. 대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멸시와 만류를 뚫고 마당 한가운데 엎드린 설화는,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를 정도로 땅에 머리를 찧으며 대사헌과의 독대를 간청했습니다.
설화의 처절한 호소에 결국 방문을 열고 나온 대사헌 앞에, 설화는 품속에서 체온으로 따뜻해진 피 묻은 장부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바쳤습니다.
"대감마님! 비천한 아녀자의 목숨을 걸고 감히 고발하옵니다. 이 장부 안에는 평양 감사와 탐관오리 최 대감이 지난 십수 년간 청나라 사신들과 결탁하여 나라의 국간을 파먹고,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고자 억울한 양민의 상단에 무기를 숨겨 반역죄로 몰아가는 끔찍하고도 구역질 나는 죄상이 모조리 담겨 있사옵니다. 부디 하늘 같은 명철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막아 주시옵소서!"
대사헌이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장부를 펼친 순간,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경악으로 벌어졌습니다. 장부 안에는 최 대감 일당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청나라 상인 누구와 뇌물을 주고받았는지, 심지어 그 뇌물이 한양 조정의 어느 중신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는지가 기생들의 구체적인 증언과 함께 섬뜩할 정도로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낱 소문이 아니라, 조정을 뒤엎을 만한 완벽한 물증이었습니다. 대사헌의 굵은 주름이 패인 손이 분노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인면수심의 가증스러운 놈들이로구나!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뒤로는 오랑캐와 결탁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억울한 생사람을 잡으려 하다니! 내 이 역적 놈들을 당장 척결하여 조선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
한편 평양에서는, 모진 고문을 끝내 이기지 못한 만덕의 처형일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형장으로 짐짝처럼 끌려 나온 만덕은 뼈가 하얗게 드러나고 온몸이 찢겨나가 스스로 서 있지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였습니다. 흐린 하늘 아래, 무자비한 망나니가 번쩍이는 큰 칼에 한 모금의 술을 뿜어내고는 덩실덩실 섬뜩한 춤을 추며 만덕의 목을 내려치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들던 바로 그 찰나였습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마치 잿빛 하늘을 두 동강 내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벼락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마패를 높이 치켜든 암행어사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수백 명의 관군이 평양 감영의 형장을 순식간에 포위했습니다. 사헌부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급파된 어사대도(御使臺徒)였습니다. 승리의 축배를 들 생각에 형장 상석에서 거만하게 웃고 있던 최 대감과 평양 감사는, 갑작스러운 어사 출도에 혼비백산하여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려 했으나, 이내 관군들의 서슬 퍼런 칼날이 그들의 살찐 목덜미를 겨누었습니다.
"네 이놈들! 더러운 탐욕에 눈이 멀어 죄 없는 백성을 모함하고 나라의 국간을 파먹은 대역죄,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당장 저 역적 놈들의 목에 칼을 씌우고 무고한 만덕을 즉시 풀어주어라!"
어사의 불호령이 형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포승줄이 풀리고 형틀에서 힘없이 풀려난 만덕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웅성거리는 군중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려온 여인이 만덕의 몸을 꽉 끌어안았습니다. 며칠 밤낮을 달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설화였습니다.
"나리... 제발 눈을 떠보시옵소서... 소녀가 늦지 않게 왔사옵니다. 이제 다 끝났사옵니다... 흑흑."
만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피와 먼지로 얼룩진 손을 힘겹게 뻗어, 오열하는 설화의 고운 뺨을 쓰다듬으며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 당신이 기필코 나를 살리러 올 줄 알았소.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할지언정, 당신의 마음만은 믿었으니까...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 목은 벌써 저승의 문턱을 넘고 있었겠지..."
가장 천대받던 밑바닥 장사치의 흔들림 없는 뚝심과,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견뎌낸 지혜로운 여인의 기지가 탐욕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기적처럼 승리를 쟁취하는, 가슴 벅차고 눈물겨운 순간이었습니다.
※ 8: 진정한 부와 사랑을 모두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살게 된 두 사람의 결말.
암행어사의 철퇴를 맞은 평양 감영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최 대감과 평양 감사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부패한 양반들은, 그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쌓아 올렸던 모든 재산을 국고로 몰수당한 채 무거운 칼을 차고 절해고도로 귀양을 떠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억울한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앗아갔던 문전옥답과 재물은 사헌부의 철저한 조사 끝에 다시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고, 깊은 한숨만 가득했던 평양 바닥에는 모처럼 사람 사는 활기찬 웃음소리가 피어났습니다.
모진 고문으로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겨 한동안 생사를 오가며 자리보전해야 했던 만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극진하게 정성을 다한 설화의 지극한 간호 덕분에 다시금 산속의 호랑이 같은 당당한 기력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억울한 반역 누명을 완벽히 벗은 것은 물론이고, 조정의 썩은 뿌리를 뽑아낸 결정적 공로를 인정받은 만설 상단은 나라의 신임을 등에 업고 이제 조선 팔도에서 감히 그 누구도 건드릴 자가 없는 최고의 거대 상단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백 척의 무역선과 수천 마리의 말에 재물을 싣고 다니며 천하의 진정한 부를 거머쥔 두 사람의 삶은, 과거 권세가들이 보여주었던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하루는 새로 지은 으리으리한 만설 상단의 본채 마루에 앉아, 곳간마다 가득 찬 곡식과 은덩이들을 바라보던 만덕이 설화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거머쥔 이 어마어마한 재물은 사실 썩어빠진 양반들의 탐욕에서 빼앗아 온,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린 것이오. 물이 한곳에 고여 흐르지 않으면 결국 썩어 악취가 나듯, 재물 또한 창고에만 쌓아두면 필시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세상을 탁하게 만드는 법이지요. 우리가 어찌 저 천박한 최 대감 무리들과 똑같은 우를 범할 수 있겠소."
만덕의 깊은 통찰이 담긴 말에, 설화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깊이 끄덕였습니다.
"나리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하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들에게 밥을 내어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얻은 이 천금의 보물을 가장 귀하게 쓰는 길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상단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문의 절반을 떼어 가뭄과 흉년이 든 고을마다 대규모 구휼미를 아낌없이 풀었습니다. 또한 오갈 데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을 거두어 큰 기와집에 살게 하며 글을 가르치고, 원한다면 상단의 일원으로 정당하게 장사를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억척스럽게 돈만 벌 줄 알았던 장사치가 베푸는 끝없는 자비에, 평양 백성들은 물론이고 팔도의 유랑민들조차 이 두 부부를 가리켜 살아있는 생불(生佛)이라 칭송하며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엎드려 존경의 절을 올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달빛이 유난히도 맑고 서늘하게 부서지던 가을밤이었습니다. 만설 상단이 조선 상권을 호령하고 있음에도, 화려한 비단 대신 예전처럼 소박하고 단정한 무명옷을 입은 만덕과 설화는 안채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 은은한 매화주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득한 세월이구려. 내가 그날 왈패들을 혼내고 객주로 돌아가려던 참에, 그 밤에 나를 부른 당신의 부름을 거절했더라면... 혹은 억만금의 뇌물을 눈앞에 두고 탐욕을 이기지 못해 최 대감의 손을 잡았더라면 어찌 되었겠소. 필시 돈의 노예가 되어 역적으로 몰리고, 일찌감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만덕이 회상에 젖어 허허 웃으며 잔을 비우자, 설화는 만덕의 빈 잔에 정성스레 술을 채우며 다정하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나리께서 억만금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곧은 지조를 지키셨기에, 평생을 진흙탕 속에서 구르던 소녀가 마침내 평생의 은인이자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사옵니다. 그날 기방에서 제 치명적인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시던 그 고집스럽고도 맑은 눈빛을... 소녀는 늙어 백발이 되어서도 결코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만덕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에게 기대어 온 설화의 어깨를 꽉 감싸 안았습니다. 밑바닥 장똘뱅이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꼿꼿한 양심과, 세상의 온갖 풍파와 거짓 속에서도 진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잃지 않았던 기생의 뜨거운 진심. 그들이 인고의 세월 끝에 함께 일구어 낸 천금의 보물 상자 안에는 번쩍이는 금괴나 은덩이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과, 헐벗은 백성들을 향한 따뜻하고도 숭고한 사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거상이 된 두 사람의 집에서는 그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그리고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을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평온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천하 명기의 은밀한 유혹과 억만금의 뇌물 앞에서도 자신의 꼿꼿한 신념을 지켜낸 장똘뱅이 만덕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부패한 권력의 억압 속에서도 진실한 사랑과 굳건한 믿음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끝내 진정한 부를 이뤄어 세상을 이롭게 한 두 사람의 행보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오늘 이야기가 통쾌하고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림 설정까지 꾹 눌러주세요! 다음 시간에도 가슴을 울리는 더욱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