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에게 청혼한 장똘뱅이 (출처-어우야담)
무녀에게 청혼한 장똘뱅이 (출처-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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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영상 대본
귀신 씌어 썩은 사과가 진시황의 불로초로 둔갑한다?!
사람들 피해 숨어 다니던 '귀신 보는 무녀' 홍련과, 돈 냄새라면 환장하는 '청산유수 장돌뱅이' 만석이 뭉쳤습니다!
"당신의 신기와 내 수완이면 조선 팔도 돈은 다 우리 거요!"
서늘한 눈빛으로 사연을 읊는 무녀와, 화려한 말발로 혼을 쏙 빼놓는 사기꾼의 기상천외한 동업! 숨만 쉬어도 엽전이 산처럼 쏟아지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목숨을 앗아갈 끔찍한 저주의 물건이 나타나는데...
조선 최고의 환상 콤비가 펼치는 유쾌하고 감동적인 한탕주의 로맨스! 과연 이들은 진짜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 바로 노다지 캐러 가보겠습니다!
※ 1: 소금 맞던 무녀, 능구렁이 장돌뱅이를 만나다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왁자지껄한 장터 한복판,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온갖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한데 뒤엉켜 거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갓 튀겨낸 고소한 유과 냄새와 기름진 전 냄새, 그리고 어물전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립니다. 대장간에서는 쇳덩이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길목 한편에서는 엿장수가 가위를 쩔렁이며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습니다. 머리에 커다란 광주리를 인 아낙네들과 지게를 진 촌부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바쁘게 오가는 이 활기찬 풍경 속에서, 유독 한 여인의 주변만 한겨울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습니다. 마치 그곳만 세상과 동떨어진 듯, 사람들은 여인이 다가오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양옆으로 쩍 벌리며 피하기 바쁩니다.
검은 치맛자락을 흙먼지 위로 질질 끌며 걷는 그녀의 이름은 홍련. 스물한 살이라는 꽃다운 나이가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한 듯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와, 촛점이 없는 듯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서늘한 눈동자. 무녀라는 꼬리표는 그녀의 삶을 철저히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홍련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구의 방울 소리도 나지 않건만, 상인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두려움에 찬 속닥거림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지만, 홍련은 그저 무감각한 표정으로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에구머니나! 재수 없게 어디서 무당년이 아침부터 장터에 얼쩡거려! 훠이! 훠이! 썩 물러가지 못할까! 아침 마수걸이도 못 했는데 부정 타게 생겼네!"
포목점 주인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비단 필을 뒤로 감추며 소리치자, 옆에 있던 국밥집 주모도 맞장구를 치며 커다란 바가지에 담긴 굵은소금을 한 움큼 집어 들었습니다.
"아이고, 내 말이! 저 눈빛 좀 보소. 당장이라도 억울한 귀신이 튀어나와 내 목덜미를 콱 물어뜯을 것 같네그려! 소금 가져와, 왕소금! 아주 그냥 액운을 싹 씻어내야지! 훠이! 물러가라, 이 삿된 것아!"
하얀 소금 가루가 눈발처럼 허공을 가르고 흩날리며 홍련의 좁은 어깨와 까만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집니다. 따가운 소금 알갱이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도, 홍련은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째서 내 눈에는 이리도 많은 것들이 보이는 걸까. 저 펄펄 끓는 국밥집 솥단지 위에서 춤을 추는 굶어 죽은 거지의 혼령도, 화려한 포목점 비단 틈에 숨어 우는 버려진 아이의 원혼도... 보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아도, 듣지 않으려 두 귀를 틀어막아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속삭이는구나. 이 지긋지긋한 신기, 차라리 내 숨통과 함께 당장 끊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깐 홍련의 입가에 자조적인 쓴웃음이 번집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날 선 욕설과 멸시보다, 허공을 떠도는 원혼들의 아우성이 그녀를 더욱 지치고 병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무녀로 태어난 죄로 평생을 사람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아이고, 성님들! 거 소금 좀 작작 뿌리쇼! 지금 배추 숨 죽일 일 있소? 이 귀한 소금을 바닥에 다 버리면 어쩌자는 거요! 돈 주고 사려면 이게 다 얼마인데!"
어디선가 낡은 등짐을 맨 사내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꾀죄죄한 무명 바지저고리에 낡고 해진 패랭이를 쓴, 영락없는 장돌뱅이의 행색. 스물다섯의 청년 만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쏟아지는 소금 세례 앞을 온몸으로 막아섰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몸을 날려 소금비루부터 홍련을 가려주더니, 먼지가 뽀얗게 앉은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어깨에 묻은 소금을 툭툭 털어내며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거 참, 우리 예쁜 각시 얼굴에 기스라도 나면 성님들이 책임질 거요? 에잇, 아까운 소금! 주모, 이따가 내 국밥에 간이나 팍팍 쳐주시오! 내 아주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다 마셔버릴 테니까!"
느닷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멈칫한 사이, 만석은 재빨리 몸을 돌려 홍련의 검은 치맛자락을 덥석 붙잡았습니다. 홍련이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만석은 패랭이를 살짝 들어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굶주린 늑대처럼 반짝이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장난기가 가득했습니다.
"저와 혼인합시다!"
장터 한복판에 벼락처럼 울려 퍼진 뜬금없는 청혼. 포목점 주인도, 국밥집 주모도, 지나가던 행인들도 모두 입을 떡 벌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적막이 흐르는 장터에서 홍련조차 당황하여 굳어버렸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억센 만석의 손에서 치맛자락을 빼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만석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절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미친 사내인지 모르겠으나, 당장 손을 놓으시오. 내 몸에는 삿된 귀신들이 득시글거리니, 부정 타서 명줄을 재촉하고 싶지 않거든 당장 뒤로 물러서란 말이오. 나는 사람의 온기를 곁에 둘 수 없는 몸이오."
홍련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만석은 오히려 눈을 더욱 반짝이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바로 그거요! 삿된 귀신! 억울한 원혼! 구구절절한 사연! 내가 며칠 동안 당신 주위를 맴돌며 지켜봤소. 당신, 길가에 떨어진 낡은 비녀 하나만 쓱 만져도 그 안에 깃든 주인의 사연을 줄줄 읊어대지 않소? 그게 다 돈이오, 돈! 당신의 그 기똥찬 신기와 이 만석이의 하늘이 내린 기가 막힌 수완이 합쳐지면, 조선 팔도 돈은 다 우리 겁니다! 혼인이 정 뭣하면 동업부터 합시다. 내가 당신 으리으리한 가마 태우고 최고급 비단옷 입혀줄 테니, 나랑 손잡고 제대로 한번 놀아봅시다, 예? 평생 소금이나 맞고 살 거요?"
만석의 눈빛은 거침없는 욕망과 확신으로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평생을 숨어 지내며 세상의 미움을 받아야 했던 무녀 홍련과, 돈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으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장돌뱅이 만석.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기묘하고도 운명적인 인연은, 하얀 소금꽃이 흩날리는 왁자지껄한 장터 한복판에서 그렇게 요란하게 막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 2: 귀신 씌인 물건을 팝니다! 환상의 사기극 시작
다음 날 아침, 장터에서 가장 후미지고 구석진 자리에 조촐한 짚 멍석 하나가 깔렸습니다. 지나가는 똥개도 거들떠보지 않을 그 초라한 멍석 위에는 이가 다 빠져나간 낡은 사기그릇 하나, 언제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만큼 썩어 문드러져 쉰내가 진동하는 사과 한 알, 그리고 뉘 집 머슴의 발에 차였는지 뒷굽이 형체도 없이 닳아빠진 낡은 짚신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코웃음을 치고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 고물상조차 욕을 하며 내쫓을 법한 흉측한 쓰레기들을 번듯하게 팔겠다고 나선 만석의 뻔뻔함에 다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습니다.
"거, 장돌뱅이 총각! 아침부터 더위라도 호되게 먹었소? 개도 냄새 맡고 도망갈 썩은 사과를 뉘한테 팔겠다고 번듯하게 멍석을 깔았소?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아까운 자리만 차지하지 말고 당장 쓰레기통에나 갖다 버리시오!"
사람들의 노골적인 조롱과 멸시에도 만석은 여유만만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패랭이를 삐딱하게 고쳐 썼습니다. 그는 오히려 가슴을 쫙 펴고 헛기침을 큼큼 해대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이고, 눈 뜬 장님들이 여기 다 모여 계셨네 그려. 이 귀하디귀한 천상의 보물들을 그저 길바닥의 굴러다니는 쓰레기로 취급하시다니, 쯧쯧.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할 팔자들이오! 자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소! 우리 용하신 무녀님께서 이 물건들의 기가 막힌 진가를 직접 밝혀주실 터이니, 다들 눈은 부릅뜨고 귀는 쫑긋 세우고 내 말 좀 들어보쇼!"
만석의 호들갑스럽고 능청스러운 외침에 사람들은 호기심 반, 비웃음 반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멍석 주위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만석은 슬쩍 눈짓을 하며 멍석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홍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습니다.
'자, 홍련아. 어제 밤새도록 연습한 대로 기똥차게 한번 읊어보는 거야. 저 무지렁이들 혼을 아주 쏙 빼놓고 지갑을 열게 만들라고.'
홍련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자신이 어쩌다 이 미친 사내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이왕 엎어진 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고 치맛자락을 단정히 정돈한 뒤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을 뻗어, 파리가 윙윙 꼬이는 썩은 사과 위에 살포시 얹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장터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일순간 물을 먹은 듯 잦아들고, 한여름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로 섬뜩하고 서늘한 바람이 훅 끼치며 사람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홍련의 맑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뒤집히듯 치켜올라가고,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낮고 탁하게 갈라진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보인다... 첩첩산중 인적이 끊긴 깊은 골짜기, 백 년을 묵은 이무기가 승천을 준비하며 똬리를 틀었던 서늘한 바위틈이 보인다. 이무기의 거친 숨결과 영험한 기운을 수십 년간 흠뻑 먹고 자란 붉은 열매... 하지만 천 년 묵은 산삼을 찾다 억울하게 죽은 심마니의 피와 한이 스며들어, 겉모습은 이토록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말았구나. 이 안에는, 산신의 맑은 정기와 심마니의 끓어오르는 붉은 생명력이 응축되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리고 있다..."
홍련의 신들린 듯한 완벽한 연기와 주위를 압도하는 서늘한 기운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썩은 사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기괴한 분위기에 휩쓸려 정말로 사과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습니다. 바로 그 절묘한 타이밍을 놓칠세라, 만석이 멍석 한가운데로 펄쩍 뛰어들며 허풍의 절정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들으셨습니까, 여러분! 두 귀로 똑똑히 들으셨습니까! 이것은 장터에서 굴러다니는 평범한 사과 나부랭이가 아닙니다! 신령님이 직접 내리신 천하의 보약, 진시황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불로초의 씨앗을 품은 영약 중의 영약입니다! 겉이 썩어 문드러진 것은 그 안의 넘쳐흐르는 양기를 껍질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터져버린 것일 뿐! 이 사과 한 입이면 굽은 허리가 펴지고, 귀먹은 자가 소리를 듣고, 아흔 먹은 노인네도 밤새 마당을 펄펄 뛰어다닌다는 기적의 과일! 단돈 두 냥! 거저 드리는 가격, 두 냥에 모십니다!"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에 억지였지만, 홍련의 신묘한 연기와 만석의 청산유수 같은 입담이 결합하자 사람들의 이성은 순식간에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한 백발의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의 전대를 다급하게 풀며 소리쳤습니다.
"내, 내가 사겠소! 우리 영감이 요즘 기력이 쇠해서 몸져누웠는데, 내가 세 냥 주겠소!"
"어허, 이 할망구가 어딜 새치기야! 내가 먼저 찜했네! 나는 다섯 냥이네! 다섯 냥 줄 테니 당장 내놓으시오!"
서로 썩은 사과를 차지하겠다고 핏대를 세우며 돈을 꺼내 드는 사람들의 미친 광경에, 만석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순식간에 썩은 사과를 팔아치운 그는 기세를 몰아 이번엔 낡은 짚신을 번쩍 집어 들었습니다. 다시 홍련의 차갑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장터에 울려 퍼졌습니다.
"지독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수만의 적을 베고 또 베어낸 장수의 칼자국이 선명하다. 북방의 오랑캐를 떨게 했던 장군의 땀과 눈물, 그리고 죽어간 적들의 원혼이 이 짚신 지푸라기 하나하나에 서려 있구나..."
만석이 다시 입에 침을 튀기며 고래고래 외쳤습니다.
"이 짚신! 그냥 버리는 짚신이 아닙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인지, 바다의 신 이순신 장군인지 하여튼 조선 제일의 명장이 신었던 전설의 유품! 이 짚신을 문지방에 딱 걸어두면 삼대째 집안을 괴롭히던 악귀도 오줌을 지리며 줄행랑을 치고, 무서운 역병도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천하무적 방어 부적입니다! 자, 이건 특별히 귀한 거니까 열 냥부터 시작합니다!"
"열두 냥! 내가 가져가겠소! 우리 집에 요즘 우환이 끊이질 않아서!"
"열다섯 냥! 우리 장손 놈 장원급제 부적으로 써야겠소! 내 당장 스무 냥도 낼 테니 내게 주시오!"
사람들은 홀린 듯 앞다투어 지갑을 열어젖혔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묵직한 엽전이 멍석 위로 쏟아지는 소리가 세상 그 어떤 악기 소리보다 경쾌한 음악처럼 만석의 귓가를 간지럽혔습니다. 어이없는 사기극이 눈앞에서 버젓이 펼쳐지는데도, 사람들은 쓰레기를 손에 쥐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가여운 인간들이구나. 허구한 날 헛것에 속아 넘어가면서도 저리 행복해하다니. 허나... 떨어지는 엽전을 보며 저리도 환하게 웃는 이 사내의 얼굴을 보니, 이 거짓부렁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네. 적어도 나를 괴물이라 부르며 돌을 던지는 자들은 없지 않은가.'
홍련은 쏟아지는 엽전을 정신없이 쓸어 담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만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무당이라 손가락질받고 소금 세례를 받던 서러운 시절은 거짓말처럼 잊혀지고, 두 사람의 초라했던 멍석 앞에는 엽전 꾸러미가 작은 산더미처럼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팔도를 뒤흔들 환상의 사기꾼 콤비가 탄생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 3: 조선 팔도 돈이 굴러들어온다, 쌓여가는 엽전 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장터 구석진 자리에서 낡은 멍석 한 장으로 시작했던 만석과 홍련의 장사는 날이 갈수록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이제는 장터 한가운데에 오색찬란하고 거대한 포장을 치고 최고급 비단 방석을 깔아놓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귀신 보는 신묘한 무녀와 청산유수 입담꾼 장돌뱅이'의 소문은 발이 달려 쏜살같이 조선 팔도를 휩쓸었고, 방방곡곡에서 그들의 기묘한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매일같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단순한 잡동사니가 아니라, 사람들의 절박한 욕망과 공포를 달래주는 신앙 그 자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늦은 밤, 한양에서 제일간다는 최고급 객주의 으리으리한 특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졌던 호화로운 산해진미 상차림이 물려진 방 한가운데서, 만석은 눈알을 번뜩이며 엽전 꾸러미를 세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오늘 하루 동안 벌어들인 돈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흔아홉, 백! 캬! 여기 한 꾸러미 추가요! 홍련아, 이것 좀 봐라. 이 영롱한 자태를 보라고! 엽전이 호롱불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게,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 같지 않냐? 오늘 하루 동안 장터에서 벌어들인 돈이 기와집 한 채 값이다, 기와집 한 채! 내일은 저잣거리에서 제일 큰 기방을 통째로 빌려서 밤새도록 잔치라도 열어야겠어!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 기생들 치맛자락에 돈을 뿌려대는 거지!"
번지르르한 최고급 비단옷을 쫙 빼입은 만석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껄껄 웃으며 차가운 엽전 무더기 위로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두 팔을 휘저으며 돈 무더기 속에서 헤엄을 치는 그의 얼굴에는 욕망과 환희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방 한구석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홍련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왕실 공주나 입을 법한 화려한 비단 치마도, 머리를 장식한 수백 냥짜리 영롱한 옥비녀도 그녀의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습니다.
'돈이 산처럼 쌓일수록, 저 사내의 눈빛이 점점 탁해지고 있어. 처음 장터에서 소금을 맞던 나를 구해주고, 넉살 좋게 웃어 보이던 그 맑고 유쾌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구나. 오직 더 많은 돈을 향한 탐욕의 시커먼 그림자만이 그의 등 뒤에 끈적하게 엉겨 붙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필시 큰 화를 당하고 말 텐데.'
최근 들어 만석이 장사를 위해 떼어오는 물건들은 예전처럼 가벼운 농담이나 연기로 넘길 수 있는 하찮은 잡동사니가 아니었습니다. 몰락한 양반가의 버려진 무덤을 파헤쳐 가져온 기와 조각이나, 망나니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서늘한 형구, 주인을 잃고 떠도는 원귀가 들러붙은 기괴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진짜 '귀물'들을 만석이 웃돈을 주고 사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련은 물건들에 깃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날카로운 곡소리가 점점 더 크고 끔찍하게 귓가를 때리는 것을 느끼며, 매일 밤 불안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만석아. 우리,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 돈은 이제 평생을 놀고먹어도 다 쓰지 못할 만큼 충분히 모으지 않았느냐. 요즈음 네가 가져오는 물건들은 예전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하나같이 사연이 깊고 원한이 사무쳐 있어, 이제는 내 신기로 억누르기가 버거울 지경이야. 더 이상 이런 삿된 것들을 함부로 건드리고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가는, 필시 하늘의 노여움을 사 화를 면치 못할 것이야."
홍련이 애절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만석의 비단 소매를 붙잡고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황금빛 돈맛에 단단히 취해버린 만석의 귀에는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만석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홍련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습니다.
"무슨 섭섭하고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이제 겨우 조선 팔도 돈줄이 우리 손아귀에 꽉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멈추자고?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어딨어! 남자는 모름지기 한양 바닥 한가운데에 아흔아홉 칸짜리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짓고, 정승 판서들도 무릎을 꿇게 만들어 봐야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넌 그냥 굿판만 벌여주면 돼!"
만석은 방 한구석, 두꺼운 천으로 겹겹이 싸매 숨겨두었던 낡고 기괴한 문양의 검은 나무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왔습니다. 상자 겉면에는 오래된 핏자국 같은 검붉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뚜껑을 열기도 전에 소름 끼치는 지독한 냉기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이거 봐, 홍련아. 이거 내가 저기 충청도 깊은 산골짝에서, 역병이 돌아 몰살당한 폐가 터를 미친 듯이 뒤져서 찾아낸 진짜 귀물이다. 듣자 하니, 억울하게 역모에 휘말려 삼족이 멸해진 대감마님 댁에 대대로 내려오던 저주받은 물건이라더군! 사연도 기가 막히고, 이 흉흉한 기운 좀 봐! 완벽하잖아! 네가 내일 장터에서 굿판을 기똥차게 한 번만 벌여주고, 내가 거기에 맞춰서 입 좀 제대로 털면, 이건 부르는 게 값이야! 한양의 그 잘난 권세가들도 줄을 서서 사려고 들걸?"
홍련이 상자 근처에 손을 가져가자마자,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수백 명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강타했습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습니다.
"안 된다! 이것은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될 물건이야! 겹겹이 쌓인 피맺힌 저주가 너무 짙어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다. 당장 이 상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상자에 깃든 악귀가 물건을 사는 자뿐만 아니라 너의 목숨까지 앗아갈 것이다! 제발 내 말을 들어!"
"에이, 악귀가 뭐 대수야! 귀신은 네가 잡고, 쏟아지는 돈은 내가 잡으면 되지! 쓸데없는 걱정 마, 오라비만 믿어! 내일 한양 장날에 이놈으로 우리 장사 인생의 끝판왕을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만석은 저주받은 상자를 품에 꼭 껴안으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습니다. 홍련은 그 광기 어린 웃음소리 너머로, 만석의 이마에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그의 명줄을 뚜렷하게 보고 말았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스스로 지옥 불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은 사내.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 그들의 목밑까지 바짝 다가와 숨통을 조이고 있었습니다.
※ 4: 끝없는 탐욕,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거래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평소 흙먼지가 날리던 장터 한복판에는 일찍이 본 적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오색 차일이 하늘을 뒤덮을 듯 쳐져 있었습니다. 만석은 평소 이마를 덮던 낡고 해진 패랭이를 집어 던지고, 대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최고급 통영갓을 비스듬히 쓴 채 단상 중앙에 섰습니다. 그의 몸을 감싼 것은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눈부시게 붉은 비단 두루마기였고, 허리에는 옥으로 장식된 호사스러운 대님이 매여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금실로 수놓은 붉은 비단이 깔린 커다란 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흉흉하고 서늘한 기운을 끊임없이 내뿜는 검붉은 나무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이 기이한 상자에 대한 소문은 이미 한양 도성을 넘어 조선 팔도로 퍼져나간 터라, 소문을 듣고 몰려든 내로라하는 부호들과 권세가들이 단상 주위를 겹겹이 빙 둘러싼 채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탐욕으로 번들거렸고, 두꺼운 전대와 금괴가 담긴 궤짝을 든 호위 무사들이 그들 뒤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 한양 도성의 높으신 대감마님들! 그리고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거상 여러분! 오늘 이 역사적인 자리에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돈이 아무리 창고에 썩어 넘치도록 많으면 무엇하고, 권력이 하늘을 찌르면 무엇하겠습니까? 사람의 명줄이 짧아 하루아침에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가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여기,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삼족이 멸하는 끔찍한 멸문지화를 입고도, 오직 이 상자를 품에 안았던 적장자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팔십 평생을 무병장수하며 부귀영화 속에서 살다 갔다는, 바로 그 전설 속의 귀물 중의 귀물입니다! 어떤 지독한 악귀도, 어떤 무서운 병마도 이 상자의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이 상자를 손에 넣는 자, 영원한 권력과 생명을 얻을 것이옵니다!"
만석의 현란하고도 확신에 찬 혀놀림이 허공을 가르자, 단상을 에워싼 양반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불로장생과 무한한 부귀영화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정통으로 찔러버린 만석의 언변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장터 곳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만석은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것을 느끼며, 단상 한편에 묵묵히 서 있는 홍련을 향해 극적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물론! 이 기이하고 영험한 물건의 진짜 가치는, 굳이 제 알량한 입술을 빌리지 않아도 조선 제일의 신기를 가졌다고 칭송받는 우리 홍련 무녀님께서 직접 굿판을 통해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자, 무녀님! 어서 이 귀물의 신령한 기운을 깨워주십시오!"
만석의 호들갑스러운 소개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홍련에게 쏠렸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무복을 차려입은 홍련은 양손에 무거운 신방울과 오색 부채를 쥐고 천천히, 아주 무겁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단상 위에 놓인 값비싼 나무 상자가 아니라, 상자 옆에서 미친 듯이 환희에 찬 웃음을 짓고 있는 만석의 얼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홍련의 영험한 눈에는 지금 너무나도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이 생생하게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내야... 네 눈에는 진정 저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저 상자는 사람을 살리는 귀물이 아니라, 사람의 피와 살을 파먹는 끔찍한 재앙 덩어리다.'
홍련의 두 눈동자에 비친 나무 상자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턱과도 같았습니다. 상자의 틈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온 시커멓고 끈적한 원혼의 그림자들이 수십 마리의 독사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와, 어느새 만석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목통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상자의 주인이 바뀌고 거액의 돈이 만석의 손에 쥐어지는 바로 그 순간, 저 짙고 사악한 저주는 온전히 만석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림자는 만석의 숨통을 쥐어짜며 그의 남은 명줄을 시시각각 태워버리고 있었고, 만석의 얼굴에는 이미 죽은 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시퍼런 사색이 돌고 있었지만, 탐욕에 눈이 먼 만석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희열에 들떠 있었습니다.
"자, 각설하고! 이제 역사적인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초가는 은정자 천 냥! 천 냥부터 모시겠습니다!"
"이천 냥! 내 당장 은정자 이천 냥을 내놓겠소! 저 상자는 우리 가문의 대들보가 될 것이오!"
"어허! 어디서 천박하게 푼돈을 들이미는가! 나는 오천 냥이오! 한양 노른자위 땅에 있는 내 집문서와 땅문서를 모두 걸겠소!"
"칠천 냥! 칠천 냥이오!"
금액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때마다 만석의 두 눈동자는 탐욕으로 벌겋게 핏발이 섰고, 그가 기쁨의 탄성을 내지를 때마다 만석의 목을 조르는 시커먼 그림자도 덩달아 몸집을 부풀리며 더욱 굵고 사나워졌습니다. 금액이 올라갈수록 만석의 명줄은 실시간으로 끊어지기 직전의 활시위처럼 팽팽해졌습니다.
'안 돼... 저대로 두면 만석이는 오늘 밤을 넘기기는커녕, 해가 지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끔찍하게 죽고 말 것이야.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내야, 네가 평생을 모으려 했던 그 잘난 돈 무더기에 깔려 네 숨통이 당장 끊어지는 줄도 모르고 어찌 그리 바보처럼 웃고만 있느냐!'
홍련의 손에 들린 무거운 놋쇠 방울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찰랑! 찰랑! 무녀가 신내림을 받아 본격적인 굿판을 시작하는 줄 알고 구경꾼들은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것은 홍련의 애타는 절규이자 목숨을 건 경고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석의 입을 막고 상자를 내던지고 싶었지만, 수백 명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허나 돈에 완전히 눈이 먼 만석과 양반들에게 홍련의 그 절박한 방울 소리는 그저 더 많은 돈을 부르는 흥겨운 축포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만석의 코밑까지 완전히 들이닥친, 일생일대의 가장 위험하고도 기괴한 거래가 파멸의 절정으로 무섭게 치닫고 있었습니다.
※ 5: 엎어진 굿판, 돈 대신 목숨을 선택한 홍련
"만 냥! 내 황금 만 냥을 내어놓을 테니, 당장 경매를 멈추고 그 상자는 내게 넘기시오!"
장터의 모든 소음을 단숨에 잠재우는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마침내 한양에서 제일가는 탐관오리로 소문난 뚱뚱한 병조판서 대감이 무리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의 수하들이 끙끙거리며 들고 온 거대한 오동나무 궤짝을 단상 위로 냅다 내던졌습니다. 쾅! 하는 둔탁하고도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궤짝의 뚜껑이 열리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번쩍이는 금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습니다. 영롱한 황금빛이 한낮의 태양 빛을 반사하며 쏟아지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숨을 멈추었습니다. 만석은 쏟아진 금괴 더미를 보자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헐떡이며 숨이 넘어갈 듯한 환희의 비명을 내질렀습니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앞뒤를 분간할 이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 낙찰! 낙찰입니다요! 천하를 호령할 이 위대한 귀물의 진정한 주인은 마침내 대감마님으로 정해졌습니다! 자, 홍련 무녀님! 어서 이 위대한 물건이 새 주인을 온전히 모실 수 있도록 마지막 축원의 굿판을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마무리해 주십시오!"
만석이 침을 질질 흘리며 대감에게 상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려는 찰나였습니다. 홍련의 두 눈에는 끔찍한 진실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고 선명하게 펼쳐졌습니다. 만석의 목을 뱀처럼 옭아매고 있던 시커먼 원혼의 그림자가, 마침내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직감하고는 거대한 맹수처럼 쩍 아가리를 벌리며 만석의 정수리를 향해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 1초만 지체하면 만석의 혼백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의 육신은 차가운 고깃덩어리가 될 것이 뻔했습니다.
찰나의 순간, 멍하게 굳어 있던 홍련의 눈빛이 밤하늘의 번개처럼 무섭게 번뜩였습니다. 그녀는 손에 꽉 쥐고 있던 놋쇠 방울과 화려한 오색 부채를 망설임 없이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단상 중앙에 굿판의 절정을 위해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던 서슬 퍼런 작두 위로 비호처럼 훌쩍 뛰어올랐습니다.
"이 미련하고 썩어빠진 인간들아! 눈앞의 알량한 황금과 탐욕이 너희의 두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었구나! 저것은 보물이 아니라 너희의 목을 칠 사신의 낫이거늘!"
서릿발같이 차갑고도 매서운 홍련의 일갈이 장터 전체에 벼락처럼 내리꽂혔습니다. 그녀는 무당의 춤을 추는 대신,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용수철처럼 펄쩍 뛰어내리며 엄청난 기세로 굿판이 차려진 커다란 제사상을 발로 거칠게 걷어차 버렸습니다.
"우당탕탕! 쨍그랑! 와장창!"
정성껏 차려놓은 큼직한 돼지머리와 화려한 삼색과일, 불을 밝히던 촛대와 무거운 놋그릇들이 단상 아래로 사방팔방 날아갔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단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 찰나의 혼란을 틈타, 홍련은 짐승처럼 몸을 날려 만석의 손에 들려 있던 그 흉흉한 나무 상자를 매섭게 낚아챘습니다. 상자에 손이 닿는 순간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냉기와 원귀들의 비명 소리가 홍련의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그리고 굿판 옆에서 액운을 태우기 위해 활활 타오르고 있던 커다란 참숯 화로 속으로, 상자를 냅다 집어 던져버렸습니다.
"아아아악! 홍련아, 안 돼! 미쳤어? 그게 어떤 물건인데! 그게 얼마짜린데!"
만석이 눈알이 뒤집힌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화염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자가 붉은 불길에 닿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기이이익-!' 하는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귀신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며, 상자 안에서 시커먼 원귀의 연기가 화산 폭발하듯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검은 연기는 사람들의 얼굴 형상을 띠고 허공을 맴돌다 불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귀, 귀신이다! 진짜 상자에서 악귀가 튀어나왔다! 도망쳐라!"
그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운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양반들과 구경꾼들은 혼비백산하여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밀치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끔찍한 아수라장 속에서 엎어진 궤짝의 황금괴와 엽전 꾸러미들이 흙바닥에 무수히 나뒹굴었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치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남의 금덩이를 줍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내 돈! 내 황금! 야 이 미친 도둑놈들아, 그거 내 금괴야! 내려놔!"
만석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흙바닥을 네 발로 기어 다니며 흩어지는 엽전과 금괴를 주워 담으려 발버둥을 쳤습니다. "안 돼, 안 돼! 내 노다지!" 하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걷어차이며, 그의 손에 남은 것은 피가 흐르는 생채기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찌그러진 엽전 몇 닢뿐이었습니다. 화로 속에서 완전히 검은 숯덩이로 변해버린 상자와 함께 만석의 목을 옥죄던 검은 죽음의 그림자도 흔적 없이 소멸했지만, 그들이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렸던 산더미 같던 재산 역시 한바탕 일장춘몽처럼 시퍼런 연기 속으로 덧없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6: 빈손이지만 가벼운 등짐, 진짜 부자를 깨닫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해 질 녘. 폭풍우가 매섭게 휩쓸고 간 듯 엉망진창으로 파괴된 장터 바닥에는 적막감만이 감돌았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오색 차일이 초라하게 바람에 펄럭이는 가운데, 만석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흙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한양 제일의 갑부처럼 행세하던 그가 입고 있던 최고급 붉은 비단 두루마기는 여기저기 무참히 찢겨나가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소중히 아끼던 윤기 흐르던 통영갓은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온몸은 멍투성이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의 떨리는 두 손에는 달랑 찌그러진 엽전 한 닢만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끝났어... 전부 다 끝났다고. 내가 평생을 바쳐 꿈꿨던 아흔아홉 칸 황금 기와집도, 비단 이부자리도, 정승 판서들의 굽신거림도... 다 허공으로 날아갔어.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내가 무슨 짓을 해서 모은 내 피 같은 돈인데! 홍련아, 넌 대체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내 인생 최고의 노다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왜 다 차려진 밥상을 뒤엎은 거냐고!"
만석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상을 지으며 원망과 절망이 뒤섞인 푸념을 허공에 대고 늘어놓았습니다. 눈물이 흙먼지 묻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꾸질꾸질한 자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화려하고 거추장스럽던 무복을 벗어 던지고, 처음 장터에서 만났을 때 입고 있던 낡고 빛바랜 검은 치마저고리로 다시 갈아입은 홍련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늘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기이하게도 처음 보는 맑고 따뜻하고 환한 미소가 봄꽃처럼 번져 있었습니다. 무당이라는 굴레에 짓눌려 평생 웃어본 적 없던 여인의 미소는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아직도 그깟 쇳덩어리들이 아까워 땅바닥에 주저앉아 질질 짜고 있는 것이냐? 네놈의 하나뿐인 명줄이 저승 문턱을 반쯤 넘어가 직전이었는데도?"
만석은 훌쩍이던 것을 멈추고 흠칫 놀라며 곁에 선 홍련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홍련의 미소에 잠시 넋을 잃었던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내... 내 명줄이라니?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래. 네가 그토록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그 저주받은 상자에 깃든 원귀가, 방금 전 네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 직전이었다. 나는 엎어진 엽전을 줍는 대신, 시궁창에 처박힐 뻔한 네 놈의 명줄을 구해서 주워 담은 것뿐이야. 돈 더미에 깔려 피 토하며 죽는 꼴을 면하게 해주었으니, 억울해하지 말고 오히려 내게 백 번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홍련의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만석은 멍한 얼굴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가만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제부터인가 가슴을 짓누르던 원인 모를 무거운 통증과, 한여름에도 뼛속까지 시리게 하던 오한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목을 조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이 끊어진 것처럼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돈을 잃었다는 절망적인 허탈감보다, 자신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다는 생경한 안도감이 온몸의 핏줄을 타고 묘하게 밀려왔습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실없는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마지막 엽전 한 닢을 허공으로 높이 튕겨 올렸다가 탁! 하고 경쾌하게 잡아챘습니다.
"하, 하하... 하긴, 돈이야 오늘 못 벌면 내일 또 벌면 그만이지! 죽어버리면 그깟 황금이 다 무슨 소용이람. 이 만석이의 천재적인 청산유수 입담과 우리 예쁜 홍련이의 기똥찬 신기만 있으면, 이 넓은 조선 바닥 어디 가서 밥은 안 굶고 살지 않겠어? 아니 밥이 뭐야, 소고기국도 거뜬하지! 안 그래?"
만석은 툭툭 흙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훌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자신이 처음 장돌뱅이 시절부터 메고 다녔던 낡고 볼품없는 나무 등짐을 주워 다시 어깨에 단단히 메었습니다. 비록 엽전 한 닢 들어있지 않은 텅 빈 등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황금 만 냥이 가득 찬 궤짝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자, 가자, 홍련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넓은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 우리 부부의 찰떡 콤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순진한 호구들이 아직 산더미처럼 널려 있을 거다!"
"어허, 누가 함부로 네 부부란 말이냐. 미친 소리 작작하고 입방정 그만 떨고 어서 앞장서 걷기나 해라."
"아이고, 우리 깐깐한 각시 부끄러워하기는! 얼굴 붉어지는 것 좀 보소!"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티격태격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 뒤로 붉은 석양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비록 손에 쥔 금은보화는 모두 사라졌지만, 진짜 부자란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힘든 순간에도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그 마음을 온전히 얻은 자라는 것을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가벼워진 등짐만큼이나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습니다. 왁자지껄한 세상을 향한 두 사람의 유쾌하고 기상천외한 두 번째 여정은, 텅 빈 장터 바닥을 뒤로한 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오늘 들려드린 '무녀에게 청혼한 장똘뱅이' 이야기, 유쾌하게 잘 감상하셨나요? 끝없는 탐욕의 끝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돈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의 생명과 곁에 있는 인연의 가치를 깨닫게 된 두 사람의 유랑기가 참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오늘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꾹 눌러주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다음 시간에도 노다지처럼 쏟아지는 흥미진진하고 배꼽 빠지는 조선시대 야담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