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배가 가라앉은 날 웃었다 『어우야담』
소금배가 가라앉은 날 웃었다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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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을 바쳐 띄운 거대한 소금배가 시퍼런 파도 속으로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이 물거품이 된 그날 밤, 빚쟁이들이 횃불을 들고 대문을 부수며 몰려들었죠. 그런데 이 사내, 피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판에 기생을 부르고 잔치를 벌이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합니다. 미친 걸까요? 아니요. 사실 그 배가 가라앉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린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요.
※ 1: 먹구름 덮인 칠흑의 바다, 그리고 무너진 상단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 듯, 온통 시커먼 먹구름이 천지를 짓누르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집채만 한 파도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거대한 상선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다. 조선 팔도에서 제일간다는 거상 최 객주의 상단이 전 재산을 털어 마련한, 수천 가마니의 귀한 소금을 실은 거대한 배였다. 평소라면 순풍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거친 물살을 갈랐을 그 장대한 배도, 대자연의 무자비한 분노 앞에서는 한낱 가랑잎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돛을 내려라! 돛을 내려! 바람에 돛대가 부러지면 배가 뒤집힌다! 우린 다 죽고 만단 말이다!"
"선장님! 늦었습니다! 우현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요! 이대로 가다간 반 식경도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뭐라고? 안 된다! 당장 짐짝을 버려라! 배를 가볍게 해야 살 수 있다! 밧줄을 끊고 소금을 모조리 바다로 밀어 넣어라!"
뱃사람들의 다급한 비명과 절규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비바람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측면을 무자비하게 강타하자, 굵은 참나무로 단단하게 엮어 올렸던 돛대가 귀를 찢는 굉음을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부러진 돛대가 갑판 위로 흉하게 쓰러지며 짐을 단단히 묶어두었던 굵은 삼줄들이 툭툭 끊어져 나갔다. 그 끊어진 틈새로 쏟아져 내린 것은 눈처럼 새하얀 소금 가마니들이었다. 백성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고, 최 객주 상단의 모든 명운이 걸려 있는 그 귀하디귀한 소금들이 무자비한 잿빛 바닷물 속으로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 바닷물에 닿은 소금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녹아 검은 심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끝이다... 우리의 목숨도, 상단의 운명도, 조선 제일이라 자부하던 우리의 자부심도 모두 끝이구나. 억울하도다... 바다를 호령하던 내가 이토록 허망하게 용왕의 제물이 되다니.'
늙은 선장은 부서진 뱃머리를 부여잡은 채 절망적인 눈으로 칠흑 같은 바다를 노려보았다. 배 밑바닥에서부터 꿀럭거리며 차오르는 차가운 바닷물 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발걸음 소리처럼 뚜렷하게 들려왔다. 결국 산더미 같은 마지막 파도가 배의 정면을 그대로 내리찍는 순간, 수천 가마니의 소금을 싣고 가던 거대한 상선은 처절한 파열음을 내며 시퍼런 바닷속으로 무겁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마지막 비명조차 거센 파도 소리에 집어삼켜졌다.
그로부터 사흘 뒤, 한양 도성 밖 마포 포구와 운종가 저잣거리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조선 제일의 거상이라 불리며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한 기세를 자랑하던 최 객주의 소금배가, 태안 앞바다에서 몽둥이 같은 폭풍우를 만나 흔적도 없이 침몰했다는 흉보가 전해진 것이다. 시장통의 상인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네, 그 끔찍한 소문 들었는가? 최 객주네 그 거대한 소금배가 몽땅 바다에 가라앉아 물귀신이 되었다네! 배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더군!"
"아이고, 이를 어째. 그 배에 실린 소금이 자그마치 최 객주의 전 재산이라 하지 않았던가? 빚을 내서라도 이번 장사에 사활을 걸었다고 들었는데. 어디 그뿐인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끌어다 쓴 사채 이자만 해도 산더미처럼 불어났을 터인데!"
"필시 하늘이 노하신 게야. 아무리 재물 복이 타고나서 돈을 긁어모으던 사람이라도, 한순간에 거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구먼. 이제 최 객주는 관아에 끌려가 매를 맞다 죽거나, 스스로 목을 매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참으로 인생무상이로다."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순식간에 온 마을과 한양 도성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최 객주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거대한 상단이 하룻밤 새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 그에게 엄청난 이자를 약속받고 큰돈을 빌려주었던 고리대금업자들과 시전 상인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이자가 이자를 낳아 산더미처럼 불어난 엄청난 빚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서서히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최 객주의 으리으리한 기와집 저택 안은 그야말로 초상집이나 다름없는 참담한 풍경이었다. 평소라면 이른 새벽부터 물건을 나르는 일꾼들의 활기찬 함성과 장부를 확인하는 주판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앞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안채에서는 최 객주의 아내가 소식을 듣자마자 혼절을 거듭하며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는 소리만 구슬프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단의 모든 대소사를 책임지며 최 객주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수하 덕수는, 다리가 꺾인 채 마당 한구석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만선의 꿈을 안고 기세등등하게 출항하던 배가 아니었습니까. 그 웅장하던 돛배가 어찌 하루아침에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아니, 길거리가 뭡니까. 당장 내일 아침이면 눈에 불을 켠 빚쟁이들이 몰려와 우리 모두를 포박하여 관아에 넘기고, 타방의 노비로 팔아넘길 것이 뻔합니다..."
덕수는 거친 주먹으로 애꿎은 흙바닥을 내리치며 서럽게 오열했다. 평생을 하늘처럼 모신 주인이자 상단의 든든한 기둥이었던 최 객주가, 이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방 안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덕수의 애끓는 예상과 달리, 최 객주가 머물고 있는 안쪽 사랑방은 폭풍 전야처럼 기이할 정도로 굳게 닫힌 채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태양이 자취를 감추며 차가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수십 개의 시뻘건 횃불이 일렁이며, 마치 먹이를 노리는 거대한 불뱀처럼 최 객주의 저택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쇠스랑과 낫, 굵은 몽둥이를 손에 거머쥔 빚쟁이들이었다. 그들의 두 눈에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분노와 기필코 내 돈을 찾아내겠다는 지독한 탐욕, 그리고 짐승 같은 독기가 서려 있었다.
"최 객주! 이 도둑놈아! 당장 튀어나오지 못할까! 네놈이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다고 우리가 모를 줄 아느냐!"
"내 돈 내놔라, 이 빌어먹을 놈아! 배가 가라앉았으면 네놈의 피를 뽑고 살을 저며서라도 내 돈을 갚아야 할 것 아니냐! 당장 나와서 무릎을 꿇어라!"
성난 군중들의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굳게 닫힌 육중한 솟을대문이 무서운 기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쾅! 대문을 때려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파열음 같았다. 저택 안에 남은 몇 안 되는 하인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웅크린 채 서로의 옷자락을 부둥켜안고 숨죽여 울었다.
"덕수야! 덕수 형님! 큰일 났네! 빚쟁이 놈들이 기어코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네! 저놈들 눈이 완전히 뒤집혔어! 어서 대감마님을 뒷문으로 피신시켜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 저 몽둥이에 맞아 죽고 말 것이야!"
어린 하인 하나가 사색이 되어 달려와 덕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덕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뼈도 못 추릴 것이 뻔했다. 그는 떨리는 양손으로 사랑방 문고리를 꽉 부여잡았다.
"객주 어른! 객주 어른! 쇤네 덕수옵니다! 어서 뒷문으로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놈들이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입니다요! 제발 문 좀 열어보시옵소서!"
그러나 방 안에서는 헛기침 소리 하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굳게 다문 문창살 틈으로는 희미한 호롱불빛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덕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덕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2: 횃불 든 빚쟁이들의 난동과 기이한 잔치
우지끈! 쾅!
마침내 참나무로 만든 육중한 솟을대문이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빚쟁이들이 시뻘건 횃불을 높이 치켜든 채 성난 맹수의 무리처럼 앞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불길이 저택의 기와지붕과 고풍스러운 기둥을 핥을 듯이 일렁였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요괴처럼 마당 곳곳에 길고 흉측하게 드리워졌다.
"최 객주! 이 사기꾼 놈 어디 숨었느냐! 당장 나와서 내 돈을 내놓아라!"
"다들 흩어져서 집안에 있는 값나가는 건 모조리 끌어내라! 마당에 있는 장독대부터 안채의 은비녀 하나, 부엌의 놋그릇 하나라도 남기지 말고 싹 다 긁어모아라! 저놈의 살갗을 벗겨서라도 이자를 받아내야 한다!"
이성을 잃고 광기에 사로잡힌 무리 중 몇몇이 쇠스랑을 휘두르며 아녀자들이 숨어 있는 안채를 향해 성큼성큼 달려가려던 찰나였다.
"모두 멈추시오!"
사랑방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며, 마치 뇌성벽력과도 같은 호통 소리가 밤공기를 매섭게 갈랐다. 두려움이라고는 한 치도 섞이지 않은 우렁차고도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랑방 앞 댓돌 위로 쏠렸다. 그곳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머리에 탕건을 반듯하게 쓰고, 최고급 명주로 지은 푸른빛 두루마기를 구김살 하나 없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최 객주가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다리가 풀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덕수가 있었다.
빚쟁이들은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당황하여 걸음을 멈췄다. 며칠 밤낮을 울고불고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수척해졌을 거라 예상했던 사내가,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혈색이 돌고 윤기가 흐르는 얼굴로 당당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맑은 눈빛에는 절망이나 두려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저놈이 지금 제정신인가? 빚쟁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쳤는데 어찌 저리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서 있단 말이냐?"
"흥! 보나 마나 알량한 허세를 부리는 게지. 최 객주! 배가 몽땅 가라앉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주제에 어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내려다보는가! 당장 내 원금 삼천 냥과 이자를 내놓지 않으면 오늘 네놈의 목숨을 이 자리에서 거두어 갈 것이다!"
선두에 선 험상궂은 인상의 고리대금업자가 몽둥이를 치켜들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멈칫했던 군중들도 다시 기세를 올리며 금방이라도 최 객주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최 객주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 살기 어린 위협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이 야심한 밤중에 귀한 손님들이 이리도 많이 누추한 우리 집을 찾아오셨는데, 집주인인 내가 어찌 문을 걸어 잠그고 모른 척할 수 있겠소."
최 객주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호탕하게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끓어오르던 마당에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기괴한 정적이 흘렀다. 분노로 날뛰던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덕수야! 뭘 그리 바보같이 떨고만 있느냐. 어서 사내답게 일어나거라."
"객... 객주 어른... 쇤네는 그저... 놈들의 기세가 너무 흉흉하고 무서워서 그만..."
"당장 일어나 뒷방 곳간에 고이 모셔둔 삼십 년 묵은 명주 독을 모조리 꺼내오거라! 그리고 찬방에 걸어둔 말린 고기와 진귀한 안주거리도 하나도 남김없이 마당으로 내오고! 당장 상을 차리지 못할까!"
"예? 도... 독을... 명주와 고기를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오늘 밤 내 집을 찾아온 이 귀한 손님들에게 내 창고에 있는 최고급 명주를 대접할 것이다! 뭘 멍청하게 서 있느냐! 어서 하인들을 불러 움직이지 못할까!"
덕수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어버린 듯한 주인의 호통에 기절할 노릇이었으나, 엉겁결에 바닥을 기어 하인들을 불러 모아 굳게 닫혀 있던 곳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리둥절해하는 군중들 앞으로 커다란 술독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고, 평민들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말린 꿩고기와 잣, 고급 약과 등 진귀한 안주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달콤하고 알싸하게 잘 익은 술 냄새가 횃불의 매캐한 연기와 섞여 순식간에 마당 전체에 진동했다.
"자, 다들 무엇을 그리 멍하니 바보처럼 서 계시오? 어서 잔을 받아 드시오! 오늘 밤은 이 최 아무개가 이승에서 쏘는 마지막 만찬이 될 터이니, 내일 일은 잊고 마음껏 먹고 마시란 말이오!"
최 객주가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커다란 표주박에 찰랑거리도록 술을 가득 퍼서, 맨 앞에 서서 몽둥이를 들고 있던 사내에게 불쑥 내밀었다. 사내는 얼떨결에 몽둥이를 내리고 표주박을 받아 들었지만,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네놈이 요사스러운 술 몇 잔 내어준다고 우리가 진 빚을 퉁치려 드는 것이냐! 어림없는 소리!"
"수작이라니! 섭섭한 소리 마시오. 내 평생 상도를 하늘처럼 지키며 살아왔소. 바다로 나간 배가 가라앉아 재물이 다 사라진 것은 온전히 하늘의 뜻이니 내 한낱 인간의 몸으로 어찌하겠소. 내일 아침 해가 밝으면 내 목을 치든, 이 집문서를 가져가 찢어버리든 당신들 마음대로 처분하시오. 허나 오늘 밤만큼은! 빈털터리가 된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가 될지도 모르니, 묵은 원한은 잠시 내려놓고 함께 밤새도록 취해 보자는 것 아니겠소!"
최 객주가 자신의 커다란 사발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입가에 흐른 술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빈 잔을 허공에 높이 치켜들고 또다시 크게 웃었다. 그 호기롭고 당당한 모습에 살기등등했던 빚쟁이들은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
'미쳤다. 평생 모은 재산을 다 잃고 충격에 완전히 실성해서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태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을 상대로 당장 몽둥이찜질을 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당장 돈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 산더미처럼 차려진 술과 안주는 평소 평민들은 언감생심 구경조차 하기 힘든 최고급 진수성찬이었다.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찼던 마당의 팽팽한 공기가 향긋한 술기운과 함께 기묘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저놈을 관아에 넘겨 노비로 팔아치우더라도, 일단 이 귀한 술이나 마시고 보자! 저놈이 우리 돈을 떼어먹고 산 술이니, 어차피 이 술과 고기도 다 우리 돈 아니냐! 실컷 먹고 배라도 채우자꾸나!"
누군가 뒤에서 냅다 외치며 바가지에 술을 퍼 마시기 시작하자, 참았던 이성을 놓아버린 다른 사람들도 허겁지겁 술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고기를 뜯어 먹으며 쩝쩝거리는 소리와 바가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소리가 마당에 진동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바람이 불 것 같았던 저택의 마당은, 순식간에 난장판 잔치통으로 변해버렸다. 알싸한 취기가 오르자 사람들은 손에 들었던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제 팔자를 한탄하거나,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마당 한구석, 댓돌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그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최 객주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마당에서는 호탕하게 취한 척 비틀거리며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던 그였지만,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만큼은 먹잇감을 노리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차갑고 형형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마셔라. 실컷 마시고 뼛속까지 취해라. 바보 같은 놈들. 내일 아침 붉은 해가 떠오르면, 잃어버린 돈 때문에 진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게 될 자가 과연 누구인지 뼈저리게 알게 될 터이니.'
※ 3: 은밀한 미소, 감춰진 노다지의 비밀
자정이 훌쩍 넘어가며 산바람이 차가워지자, 요란하고 광기 어렸던 잔치판도 서서히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독기를 품고 문을 부수며 몰려왔던 수십 명의 빚쟁이들은 삼십 년 묵은 독한 명주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마당 곳곳에 볼썽사나운 자태로 나뒹굴며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던 횃불도 하나둘 사그라들어 재만 남았고, 차가운 밤이슬만이 널브러진 취객들의 이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최 객주는 비틀거리던 연기를 멈추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다시 사랑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덕수가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소리 죽여 훌쩍이고 있었다. 최 객주가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닫고 방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자, 덕수가 눈물 콧물을 훔치며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객주 어른... 진정 충격에 실성하신 것이옵니까? 어찌하여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승냥이 같은 무뢰배 놈들에게 집안에 남은 마지막 귀한 술과 음식을 내어주신단 말씀이십니까. 내일 날이 밝고 저놈들이 술에서 깨어나면, 어르신을 가만두지 않고 관아로 끌고 갈 터인데... 이제 쇤네와 상단의 식구들은 무얼 먹고 어찌 살란 말씀이십니까. 차라리 저 밤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덕수의 애끓는 하소연과 원망을 조용히 듣고 있던 최 객주가 천천히 탁자 위에 놓인 다기에서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차 향을 깊게 음미했다. 방금 전까지 마당에서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어대던 취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천하의 흐름을 읽어내는 날카롭고 빈틈없는 지략가의 진짜 얼굴이 서늘하게 드러나 있었다.
"덕수야."
"예... 예, 어르신..."
"그 흉한 울음을 당장 그치거라. 내가 오랫동안 너를 곁에 두고 가르쳤거늘, 넌 내가 진정 다가오는 폭풍우 하나 예측하지 못하고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몽땅 낡은 배에 실어 바다로 밀어 넣을 만큼 멍청한 장사치로 보이더냐?"
낮고 차분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듯한 뼈가 있는 그 서늘한 말에 덕수는 딸꾹질을 하며 울음을 뚝 그쳤다. 그는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멍하니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최 객주의 입가에는 마당에서 취객들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그 알 수 없는 옅고 은밀한 미소가 다시금 걸려 있었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배는 분명 끔찍한 폭풍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서 침몰했다고 평택 포구에서 전갈이 오지 않았사옵니까..."
"배는 가라앉았다. 네 말이 맞다. 내가 출발 전 선장에게 은밀히 지시한 대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한 곳에서, 정확한 시간에 가라앉았지."
덕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시한 대로 가라앉았다니? 스스로 전 재산이 실린 배를 바다 밑바닥에 처박았단 말인가? 그것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놀랄 것 없다. 이 방에는 오직 너와 나, 우리 둘뿐이니 내 이제야 감춰둔 진실을 말해주마. 네가 알다시피, 이번 소금 장사는 평범한 장사가 아니었다. 지난달 평안감사로 내려간 그 탐욕스럽고 잔인한 김 대감 놈이, 내 상단의 목줄을 쥐고 강제로 떠맡긴 목숨을 건 일이었지."
최 객주의 두 눈에 짐승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 평안감사 김 대감. 한양에서부터 온갖 수탈과 고리대금으로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권력자였다.
"그 탐관오리 놈이 한양과 평안도에서 모아들인 어마어마한 뇌물과 장물들을 눈을 피해 중국 명나라로 빼돌리기 위해, 관의 배가 아닌 내 덩치 큰 소금배를 방패막이로 이용한 것이다. 출항하기 전날 밤, 소금 가마니를 싣기 전에 김 대감의 수하들이 한밤중에 몰래 배 밑바닥 선창 깊숙한 곳에 실어 놓았던 무거운 오동나무 궤짝들... 네가 검수를 하며 그것을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아! 그, 장정 넷이 들어도 쇳덩이처럼 꼼짝도 안 할 만큼 무겁던 그 궤짝들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무거운 돌덩이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돌덩이? 하하하! 그 궤짝 안에 든 것은 한낱 돌부스라기가 아니라, 죄 없는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어 주조한 조선의 밀은(密銀, 밀수용 은괴) 수만 냥과 황금붙이, 그리고 진귀한 보석들이었다. 김 대감 놈은 내 소금배에 그것들을 숨겨 중국으로 밀항시킬 참이었지. 만약 그 배가 무사히 중국 땅에 도착한다면 놈은 황제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를 얻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소금배를 불법 밀수한 배로 나포한 척 꾸며 내 배와 상단의 남은 재산마저 통째로 빼앗고 내 목을 칠 심산이었다. 놈의 그 얄팍하고 더러운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덕수는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평안감사의 거대하고 끔찍한 음모의 실체가 눈앞에 낱낱이 드러나고 있었다.
"하여, 나는 태풍이 서해로 북상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미친 척 출항을 명한 것이다. 내가 가장 믿는 늙은 선장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미리 은밀한 지시를 내려두었지. 망망대해 먼바다가 아니라, 태안 앞바다의 조류가 가장 거세고 물길이 복잡한 얕은 암초 지대, 이른바 '쌍둥이 여울'로 뱃머리를 몰라고 말이다."
"쌍... 쌍둥이 여울이요? 그곳은 썰물 때면 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곳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그런 얕은 곳으로..."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배가 얕은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가라앉으면, 그 위에 실린 수천 가마니의 하얀 소금은 거센 바닷물에 흔적도 없이 완전히 녹아버리겠지. 겉보기에는 내 평생 모은 재산이 바다에 삼켜져 완벽하게 파산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김 대감 놈도 침몰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은괴가 깊고 깊은 바다에 빠진 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하겠지. 군사를 동원해 장물을 찾으려 했다간 역풍을 맞을 테니 말이다."
최 객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방 창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단단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나... 소금은 바닷물에 녹아 사라져도, 무거운 은괴와 황금은 절대 물에 녹지 않는다. 쌍둥이 여울의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아. 게다가 내일 다가오는 보름은 일 년 중 바닷물이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많이 빠진다는 대조기, 즉 백중사리(백중날의 크게 지는 조수)가 아니더냐."
덕수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밖에서 자고 있는 빚쟁이들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뻗쳐오르는 엄청난 전율과 소름 때문이었다.
"그... 그렇다면 어르신... 설마..."
"그래. 내일 밤, 백중사리의 거대한 썰물이 쏴아아 소리를 내며 바다의 밑바닥을 온전히 드러내는 바로 그 시간. 그 질척이는 갯벌 위에는 짠물에 흔적 없이 녹아버린 내 소금 대신, 김 대감 놈이 평생을 긁어모은 수만 냥어치의 진짜 노다지가 진흙 속에 고스란히 처박혀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얄팍한 전 재산인 소금배를 미끼로 과감하게 던져, 그 늙고 탐욕스러운 여우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버리고, 진짜 황금배를 건져 올릴 참이다."
최 객주는 창밖, 마당에서 코를 골며 널브러져 있는 빚쟁이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미소 지었다.
"저 바보 같은 놈들이 술에서 깨어나 내일 아침 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칼을 들이댈 때쯤이면... 이미 태안에 매복시켜 둔 내 수하들이 쌍둥이 여울의 갯벌에서 그 황금 궤짝들을 썰매에 실어 나르고 있겠지. 누가 진짜 모든 것을 잃고 미친 자인지, 누가 진짜 승리자인지... 내일 아침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면 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조선 제일의 거상이 짓는 은밀하고도 서늘한 미소는, 다가올 거대하고도 통쾌한 반격의 서막을 조용히 알리고 있었다.
※ 4: 탐관오리의 탐욕, 스스로 파놓은 무덤
같은 시각, 한양에서 수백 리나 멀리 떨어진 평안감영. 평안감사 김 대감이 기거하는 호화롭고 거대한 내아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금은보화의 광채와 기생들의 분내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탐욕스럽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헐벗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최고급 비단으로 지은 금침에 비스듬히 누워, 중국에서 거액을 주고 들여온 희귀한 향을 여유롭게 맡고 있던 그의 기름진 얼굴에는 오만함과 탐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며칠 전 한양의 최 객주가 띄운 소금배에 몰래 실어 보낸, 막대한 양의 밀은(密銀)과 황금 궤짝 생각뿐이었다.
'어리석은 상놈의 새끼. 제깟 놈이 감히 평안감사인 내 지엄한 명을 거역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겉으로는 조선 제일의 거상이니 뭐니 떠받들어지지만, 내 권력 앞에서는 한낱 기어 다니는 벌레에 불과한 것을. 그 소금배가 무사히 서해를 건너 명나라 상인들에게 닿기만 하면, 나는 이 좁아터진 조선 바닥을 미련 없이 떠나 떵떵거리며 황제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 배가 도착했다는 전갈이 오면, 당장 그 배가 밀수를 했다는 명분으로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워 최 객주 그놈의 남은 재산마저 모조리 관아로 몰수해버릴 참이다. 그놈의 목숨줄은 온전히 내 손아귀에 있는 것이지. 암, 그렇고말고.'
김 대감은 음흉하고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진귀한 옥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수십 년간 벼슬아치 노릇을 하며 백성들의 세금을 횡령하고 뇌물로 긁어모은 재물, 억울한 백성들에게 역모를 씌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뒤 빼앗은 비옥한 토지와 금붙이들이 모두 그 무거운 오동나무 궤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목숨이자, 그의 막강한 권력이었고, 그의 미래 그 자체였다. 이 완벽한 계획에 흠집이 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는 연신 실실거리며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다급하고 거친 발걸음 소리가 내아의 나무 복도를 요란하게 울렸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큰일이옵니다! 깨어 계시옵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심복 수하의 목소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시나무 떨리듯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잠을 방해받아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김 대감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비단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오밤중에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대는 것이야! 네놈이 정녕 목이 달아나고 싶은 게로구나!"
우당탕탕! 방문이 덜컹 열리며 사색이 된 수하 하나가 방바닥으로 굴러들어오듯 납작 엎드렸다. 그의 이마에서는 팥알만 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죽여주시옵소서, 대감마님! 방, 방금 전, 한양과 평택 포구에서 급전이 번갈아 당도하였사온데... 최 객주의 상단이 띄운 그 거대한 소금배가... 태안 앞바다에서 몽둥이 같은 거센 폭풍우를 만나 그만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 침몰하였다 하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도 모조리 물귀신이 되었고, 실려 있던 짐들도 몽땅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는 끔찍한 비보이옵니다!"
"무... 무엇이라? 지금 네놈이 뭐라 주둥이를 놀린 것이냐! 다시 말해보아라!"
김 대감의 두 눈이 화로의 붉은 불꽃처럼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버선발로 뛰어나가 바닥에 엎드린 수하의 멱살을 움켜쥐고 미친 듯이 앞뒤로 흔들어댔다.
"침몰이라니! 가라앉다니! 그 산처럼 큰 배가 폭풍우 따위에 가라앉다니! 그 안에 내 피 같은 재물이, 내 평생을 짐승처럼 바쳐 모은 그 귀한 은덩이와 황금들이 얼마나 많이 실려 있었는데! 당장 군사를 풀어라! 수군을 총동원하여 당장 바다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 궤짝들을 찾아내란 말이다! 단 하나의 은괴라도 잃어버렸다간 네놈들 목을 모조리 쳐버릴 것이다!"
"대, 대감마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태안 앞바다는 평소에도 조류가 거세고 물길이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옵니다. 게다가 폭풍에 배가 완전히 쪼개져 뱃사람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마당에, 바다의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데 어찌 잠수부들을 시켜 그 무거운 궤짝들을 건져 올리겠습니까요... 이미 용왕의 제물이 되어 깊은 심연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아버렸을 것이옵니다..."
수하의 울먹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 대감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쩍쩍 갈라져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한 끔찍한 충격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짐승의 것과 같은 게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생을 걸쳐 긁어모은 재물이,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줄 그 찬란한 황금이 시퍼런 바닷물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렸다니. 당장이라도 가슴을 치고 바닥을 뒹굴며 통곡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배에 실려 있던 궤짝들은 애초에 명나라로 몰래 빼돌리려던 불법적인 장물이자 밀은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관아의 군사와 수군을 공식적으로 동원해 바다를 뒤진다면, 사헌부의 감찰과 조정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재물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목마저 형장의 이슬로 처참하게 사라질 것이 자명했다.
'아아... 내 돈... 내 황금... 내 은덩이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단 말이냐! 내 평생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다니!'
김 대감은 방바닥을 뒹굴며 피가 맺히도록 자신의 가슴팍을 쥐어뜯고 머리칼을 쥐어박았다.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며 그의 핏발 선 눈동자는 점차 이성을 잃고 광기로 짙게 물들어갔다. 도저히 이 분통을 삭일 길이 없었다. 이 끔찍한 사태의 원흉을 찾아내 어떻게든 살점을 뜯어먹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최 객주... 이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천하의 요사스러운 장사치 놈! 필시 하늘이 노하여 네놈의 더러운 소금배에 천벌을 내린 것이 분명하다! 네놈이 감히 내 귀한 재물을 물귀신에게 제물로 바쳐? 내 당장 이놈의 구족을 멸하고 살점을 발라 산중의 개미 떼에게 던져주리라!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다!"
그는 당장 벼루에 먹을 갈아 붓을 든 뒤, 한양에 대기시켜 둔 자신의 심복 무사들에게 은밀한 전서를 휘갈겨 썼다. 최 객주의 저택을 급습하여 놈을 오라에 묶어 당장 평안감영으로 대령하라는 추상같고도 잔인한 명령이었다. 배에 실려 있던 재물을 잃었으니, 최 객주의 숨겨둔 남은 재산과 가솔들이라도 모조리 관노비로 팔아 치워 그 막대한 손해를 조금이나마 메워야겠다는 악독하고도 치졸한 심보였다. 끝없는 탐욕에 두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 탐관오리는, 자신이 파놓은 거대한 함정에 스스로 목을 들이밀고 걸려들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미친 짐승처럼 밤새도록 방 안을 서성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가 분노와 절망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서해의 바닷바람은 차갑고도 매섭게 방향을 바꾸며 서서히 바다 밑바닥의 비밀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5: 백중사리 썰물이 드러낸 갯벌, 진짜 사냥의 시작
서해안 태안 앞바다. 험준한 기암괴석이 거대한 병풍처럼 둘러쳐진 해안가에는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음산한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일 년 중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극대화된다는 대조기, 바로 백중사리의 날이었다. 평소라면 성난 파도가 바위를 집어삼킬 듯 무섭게 넘실거렸을 험한 바다가, 오늘 밤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숨을 죽인 채 고요했다. 밤하늘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둥실 떠오른 거대한 보름달이 차가운 은빛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웅장한 대자연의 마법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바닷물이 육지에서부터 저 멀리 까마득한 수평선 끝까지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바닷물이 육지를 버리고 먼바다로 빠져나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용이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처럼 장엄하고도 기괴하게 해안가를 울렸다. 짠물이 빠진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검은 갯벌이 흉측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깊은 바닷속에 웅크리고 숨어 수많은 배를 침몰시켰던 날카로운 암초들이 뼈앙상한 이빨을 드러내듯 곳곳에 솟아올랐고, 코를 찌르는 짭조름하고도 비릿한 바다 내음과 진흙 냄새가 사방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이곳이 바로 조류가 험하고 물길이 복잡하기로 서해안에서 악명 높은 '쌍둥이 여울'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해안가 갈대밭 사이에서, 수십 명의 다부진 장정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숨죽인 채 갯벌이 드러나는 광경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최 객주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상단의 최정예 수하들과, 며칠 전 침몰 사고에서 헤엄쳐 살아남아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던 소금배의 뱃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곁에는 갯벌을 이동하기 위해 튼튼한 참나무로 엮어 만든 거대한 썰매들과, 수만 냥의 짐을 끌 수십 필의 건장한 조랑말들이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대행수 어르신, 바닷물이 드디어 바닥을 쳤습니다. 물길이 일 년 중 가장 멀리 물러나는 '진(盡)썰물'의 때가 도래했습니다요! 암초의 뿌리까지 훤히 보입니다!"
어둠 속에서 바다를 관찰하던 사내 하나가 다급하면서도 흥분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리를 이끌고 있던 상단의 대행수가 달빛 아래서 번뜩이는 매서운 눈으로 드넓은 갯벌을 좌우로 훑어보았다.
"시간이 없다. 다음 밀물이 밀려오기 전까지 한 식경(약 30분) 안에 이 거대한 작업을 모두 끝내야만 한다. 지체하다간 저 무서운 바닷물에 우리 모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자, 바람을 가리고 횃불을 밝혀라! 썰매를 끌어라! 어서 갯벌로 진입하라!"
대행수의 단호한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정들은 일사불란하고도 날쌔게 움직였다. 발이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질척하고 차가운 갯벌 위로,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든 썰매들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그들은 희미한 달빛과 조그만 화로 불씨에 의지한 채, 미끄러운 진흙을 헤치며 암초 지대를 향해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두 개의 암초 사이에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거대한 소금배의 흉측한 잔해가 그들 눈앞에 나타났다. 두 동강이 나버린 선체는 진흙 속에 반쯤 처박혀 있었고, 며칠 전만 해도 갑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천 가마니의 새하얀 소금은 이미 거센 바닷물에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가 텅텅 비어 있었다. 소금은 완벽하게 바다에 녹아버린 것이다.
"대행수 어르신!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부서진 배 밑바닥 선창 쪽에 무거운 오동나무 궤짝들이 진흙에 반쯤 묻혀 널브러져 있습니다! 소금물에 불어 터지긴 했으나 자물쇠는 온전합니다!"
선창 깊숙한 곳을 뒤지던 사내 하나가 터질 듯한 심장을 억누르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장정들이 일제히 쇠스랑과 굵은 밧줄을 들고 잔해 속으로 달려들었다. 짠물에 절여진 무거운 진흙을 맨손으로 파내고 두꺼운 밧줄을 궤짝에 걸어 있는 힘껏 당기자, 쩍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인 남자 두 명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묵직한 오동나무 궤짝들이 갯벌 위로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끝도 없이 딸려 나오는 궤짝들의 엄청난 무게감에 장정들은 혀를 내둘렀다.
"빨리 자물쇠를 부수고 열어보아라! 안의 내용물이 짠물에 상하지 않고 온전한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대행수의 다급한 지시에 장정 하나가 쇠지렛대로 궤짝의 녹슨 자물쇠를 거칠게 내리쳐 부수고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주변을 밝히던 희미한 횃불 빛과 차가운 달빛이 궤짝 안으로 쏟아지며, 어둠을 찢는 찬란하고도 황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헉..."
"이, 이것은... 세상에..."
장정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숨을 들이켜며 뒤로 주춤물러섰다. 궤짝 안에는 바닷물 방울이 영롱하게 맺힌 은괴 수만 냥과,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는 커다란 금두꺼비, 그리고 각종 진귀한 옥석과 보석들이 빈틈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가벼운 소금은 바닷물에 흔적 없이 녹아 사라졌지만, 탐관오리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 억지로 뭉쳐놓은 그 무거운 탐욕의 덩어리들은 깊은 뻘밭 속에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최 객주의 소름 돋는 지략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객주 어르신의 혜안이 한 치의 틀림도 없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저 잔인한 바다가 우리에게 내어준 진정한 노다지가 아니더냐! 평안감사 놈의 더러운 돈이 이제야 진짜 주인을 만난 것이다!"
대행수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밤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기쁨에 취해 있을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어둠 속에서부터 다시 으르렁거리는 무서운 파도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다가 다시 자신의 영역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거대한 밀물을 밀어 올려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서둘러라! 기뻐할 시간조차 없다! 궤짝들을 당장 썰매에 단단히 묶고 육지로 끌어내라! 한 시라도 지체하면 저 성난 바닷물에 우리 모두 물귀신이 될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라! 당장 수레에 싣고 한양으로 출발할 채비를 하라!"
장정들은 사력을 다해 궤짝들을 썰매에 싣고 질척이는 갯벌을 가로질러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무거운 진흙밭이었고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들의 땀투성이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거대한 승리감이 터질 듯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등 뒤로 무서운 기세로 차오르는 시퍼런 바닷물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며 마침내 육지에 다다른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조랑말의 수레에 궤짝들을 재빠르게 옮겨 실었다. 동틀 녘의 희뿌연 새벽안개를 가르며, 수만 냥의 진짜 노다지를 가득 실은 마차 행렬이 한양을 향해 힘차고도 경쾌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걸었던 통쾌한 역전극의 마지막 장이, 저 멀리 밝아오는 붉은 태양과 함께 장엄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 6: 통쾌한 역전, 소리 내어 웃는 자와 피눈물 흘리는 자
다음 날 아침. 한양 도성 안 최 객주의 거대한 저택 마당은 끔찍한 숙취와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간밤에 최 객주가 기이하게 내어준 삼십 년 묵은 명주와 고기에 취해 바닥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던 빚쟁이들이, 차가운 아침 햇살에 하나둘 부스스 눈을 뜨며 쓰라린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 그들은 어젯밤 술김에 보여주었던 유연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시금 독이 바짝 오른 승냥이 떼로 돌변하여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이런 젠장할! 머리가 깨질 것 같구나! 우리가 어젯밤 저 교활한 놈의 요사스러운 술수에 완벽하게 놀아났어! 술 몇 잔 얻어먹고 기분이 좋아져서 우리 피 같은 돈을 포기할 줄 아느냐! 어림없는 소리!"
"최 객주 당장 튀어나오라 그래! 오늘 그놈의 팔다리를 꺾어 분질러서라도 장부의 빚을 받아내고야 말겠다! 집안 기둥뿌리라도 뽑아갈 테니 당장 문 열고 나오지 못할까!"
시끌벅적한 고함과 상스러운 욕설이 마당을 가득 채우며 난무하는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장한 사내 수십 명이 부서진 저택 대문을 거칠게 짓밟으며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간밤에 평안감사 김 대감의 밀명을 받고 한양에서부터 말에 채찍질을 해가며 밤새 달려온 살수들이었다. 그들의 험상궂은 대장이 시퍼런 칼등을 번쩍이며 마당 한가운데로 거만하게 나섰다. 빚쟁이들은 서슬 퍼런 무사들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며 양옆으로 길을 텄다.
"모두 비켜라! 우리는 지엄하신 평안감영에서 온 자들이다! 죄인 최 아무개는 국법을 어기고 감영의 귀한 물건을 바다에 수장시킨 죄로 당장 하옥될 것이다! 어명이나 다름없으니, 당장 놈을 끌어내어 무릎을 꿇리고 포박하라!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베어도 좋다!"
빚쟁이들의 원성과 김 대감의 무사들의 살기가 뒤엉켜 마당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최 객주는 빚쟁이들에게 맞아 죽거나, 관아로 끌려가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문을 받다 죽을 두 가지의 참혹한 길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상단의 하인들은 절망에 빠져 구석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끼이익-
바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사랑방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최 객주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간밤의 기이한 연회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위풍당당한 자태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절망 따위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빚쟁이들과 무사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일제히 그의 목줄기를 향해 꽂혔지만, 최 객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댓돌 위에 태산처럼 우뚝 섰다.
"이 맑은 아침부터 남의 집 앞마당이 참으로 소란스럽고 흉흉하구려. 다들 내게 받을 돈이 그리도 급하시오? 아니면, 평안감사 나리께서 잃어버린 '그 더러운 물건'이 못내 아쉬워, 가여운 백성인 내 목이라도 당장 치라 명하시던가요?"
최 객주의 조롱 섞인 도발에 무사들의 대장이 흠칫 놀라며 미간을 찌푸렸고, 이내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고 으르렁거렸다.
"이놈! 네놈이 정녕 실성하여 살기를 포기한 것이로구나! 지엄한 명을 거역하고 배를 침몰시켜 대감마님의 막대한 재물을 날려버린 것도 모자라, 어딜 감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여봐라, 저 역적 놈을 당장 끌어내려 무릎을 꿇려라! 입통을 찢어놓을 것이다!"
무사들이 칼을 빼 들고 최 객주를 덮치려던 찰나였다.
"잠깐! 내 목을 치는 것은, 이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물건'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난 뒤에 해도 절대 늦지 않을 것이오!"
최 객주가 품에서 접선을 꺼내 쫙 펴며 대문 밖을 향해 크게 손짓했다. 그와 동시에, 저택 바깥쪽 골목에서부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무거운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릉, 쿠릉, 쿠르릉. 그 묵직한 진동에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의 발밑까지 떨려왔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관군이라도 들이닥친 것이냐?"
모두의 시선이 반쯤 부서진 대문 쪽으로 쏠렸다. 흙먼지를 거칠게 일으키며 십여 대의 육중한 수레가 저택 마당으로 줄지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조랑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끌고 온 수레 위에는 낡은 짚단으로 꽁꽁 덮어놓은 커다란 오동나무 궤짝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마차를 늠름하게 이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갯벌에서 갓 돌아온 대행수와 뻘흙을 뒤집어쓴 상단의 장정들이었다.
"객주 어르신! 분부하신 물건들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무사히 대령하였사옵니다!"
대행수가 우렁차게 외치며 첫 번째 수레로 다가가 짚단을 확 걷어내고, 궤짝의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차르르륵-! 번쩍!
순간, 아침의 붉은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수만 냥의 은괴와 커다란 금두꺼비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고도 황홀한 광채를 뿜어내며 칙칙했던 마당을 눈부시게 가득 채웠다.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과 은빛 물결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빚쟁이들의 몽둥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턱은 가슴까지 내려왔다. 기세등등하던 김 대감의 무사들 역시 공포와 경악에 질려 칼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원히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줄로만 알았던 평안감사의 그 어마어마한 밀은이 바로 눈앞에, 티끌 하나 상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 다들 똑똑히들 보시오! 내 소금배는 얕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아 가벼운 소금은 짠물에 다 녹아버렸으나, 배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이 바닷속 돌덩이들은 썩지도 녹지도 않고 이리 무사히 돌아왔소이다!"
최 객주는 호탕하게 웃으며 수레로 다가가 은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빚쟁이들의 발밑 바닥에 쨍그랑하고 내동댕이쳤다. 맑고 청아한 은의 파열음이 마당을 울렸다.
"어젯밤 나를 죽이려 몽둥이를 들고 왔던 빚쟁이들에게 말하겠소! 내 상단이 당신들에게 빌린 빚이 원금과 그간 밀린 이자를 합쳐 도합 일만 냥이라 했소? 여기 있는 이 썩어빠진 은괴들로 당신들 빚을 두 배, 아니 세 배로 쳐서 섭섭지 않게 갚아줄 테니, 지금 당장 셈을 치르고 차용증을 내 앞에 당장 넘기시오!"
"아이고! 객주 어르신! 진정 백 번 천 번 무지몽매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 객주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이 덤벼들던 빚쟁이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최 객주를 향해 연신 절을 해댔다. 어젯밤의 빚쟁이들이 이제는 살아있는 재물신을 만난 듯 굽신거리며 은괴를 줍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최 객주는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번에는 사시나무 떨듯 서 있는 김 대감의 무사 대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매서웠다.
"그리고... 평안감영에서 주인의 명을 받고 달려온 충직한 개들에게 똑똑히 전하거라. 김 대감 나리께서 관의 권력을 이용하여 내 소금배에 몰래 실어 명나라로 빼돌리려 했던, 이 막대한 뇌물과 피 묻은 장물들은... 조선의 가여운 백성들을 위해 이 최 객주가 참으로 고맙게 잘 쓰겠다고 말이다!"
"네, 네 이놈! 그것이 뉘 집 물건인데 감히 상놈의 새끼가 가로채려 드느냐! 당장 그것을 내놓지 못할까!"
무사 대장이 억지소리를 박락 지르며 칼을 들이밀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모든 확신을 잃고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가로채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소리! 내가 훔친 것도 아니요, 바다에 버려진 것을 주워왔을 뿐이다! 정녕 이 막대한 재물이 지엄하신 평안감사의 것이라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거든, 당장 의금부와 사헌부에 고변을 하여 조사를 받게 하면 될 터! 평안감사가 수만 냥의 밀은을 명나라로 밀수하여 빼돌리려 했다는 끔찍한 사실이 조정과 전하의 귀에 들어가면, 과연 뉘 목이 먼저 작두 위에서 달아날 것 같으냐? 억울하거든 당장 관아로 달려가 포도대장을 불러오너라! 내 기꺼이 장부와 함께 이 은괴들을 사헌부에 바칠 테니!"
최 객주의 추상같은 호통에 무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 장물이 관아에 넘겨지는 순간, 밀수에 가담한 자신들은 물론이요, 주군인 김 대감마저 역모와 횡령, 국법 문란죄로 엮여 삼족이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들은 분노로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면서도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꽁지가 빠지게 칼을 집어 던지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탐욕에 눈이 멀었던 권력자가 결국 제 꾀에 넘어가 모든 것을 잃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 꼴좋구나! 꼴이 참으로 좋아!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던 거머리 같은 놈들이 도망치는 꼴을 보라!"
모든 빚을 두 배로 청산하고도 수만 냥의 막대한 재물이 마당 가득 고스란히 남아 있는 눈부신 앞마당. 그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서 조선 제일의 거상, 최 객주는 그동안 참았던 묵은 체증을 날려버리는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렸다. 전 재산을 실은 배를 스스로 침몰시키는 상식을 뛰어넘는 기지로 자신의 목을 옥죄던 탐관오리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잃어버린 것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부를 쟁취해 낸 사내. 그의 호탕하고도 통쾌한 웃음소리가 맑게 갠 한양의 푸른 하늘 위로 끝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수천 가마니의 소금배가 가라앉은 그날, 진정으로 소리 내어 웃은 자는 오직 기지를 발휘한 최 객주 하나뿐이었다.
유튜브 엔딩멘트
전 재산을 바쳐 스스로를 미끼로 던진 거상 최 객주의 기막힌 지혜, 어떠셨나요?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의 것을 탐하던 자는 결국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피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절망을 노다지로 바꾼 통쾌한 이야기가 구독자님들의 일상에도 시원한 사이다가 되었길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가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꾹 눌러주시고, 다음에도 노다지 캐는 재미있는 야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부자 되세요!